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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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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Jun 04. 2019

오십,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산남일기 #01

열 살, 스무 살 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 하루하루 쌓여가는 때라 나이 먹는 것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것에 큰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한 건 서른이 되고서였다. '아, 서른이라니.. 이제 정말 나이를 먹는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하지만, 뭔가 모를 편안함도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직장을 옮기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빡빡하게 이십 대를 보낸 탓에 이제 서른이면 안정적인 일상을 누릴 수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기는 거의 어렵다는 사실을.


오십을 지나면서, 다시 내 삶을 재정비해야 함을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회적인 성취를 향해 젊음을 소진했으나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인다는 것을 나와 남편은 절감하고 있었다. 이제까지는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삶이었다면 앞으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내려가는 속도와 기울기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야심 차게 벌여 놓았던 O2O 스타트업 [미친물고기]가 오프라인 공간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식당으로 변질되고 자영업자로 바뀌는 상황이었고, 과연 내가 더 나이 먹도록 식당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과 담담하게 마주해야 했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결심하여 사업을 접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당연히 큰 성취에 대한 기대를 함께 접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금전적인 손해도 적지 않았다.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벌이면서 살았지만, 어렴풋하게 이제는 벌일 때가 아니라 정리하면서 마음 편안하게 나머지 여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자면 일을 벌이면서 덤으로 가지를 친 대출이며, 씀씀이를 줄이고 정리할 계획도 해야 했다.


내 삶이 펼쳐지는 느낌과 접는 느낌은 확연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했다. 미래를 기대하고 액셀을 밟는 삶보다는 속도를 줄이고, 때로는 멈추어서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데는 적잖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도 조금씩 연습하고 노력하며 적응해나가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커다란 결심을 했다. 십 년 넘게 살던 여의도 집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평생 살면서 '재테크'를 배우지 못한 탓에 우리 부부는 돈을 잘 모으고 굴리는 일에 서툴렀다. 나야 돈이 생기면 창업을 했고, 남편은 '맞벌이' 환경이니 만큼 용돈을 쥐어짜며 살지는 않았다. 강남에 집을 사서 몇 배로 뛰었다는 남들의 재테크 성공담에 크게 배 아파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돈을 잘 불리기 위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게을리하며 살았다.


<이사 전 날, 짐을 싸고 마지막으로 한강공원 산책에 나섰다>


그렇게 우리에게 남은 '자산'은 파주시에 지은 전원주택이 전부였다. 적당한 시기에 팔고 다른 집을 구매하는 일련의 일들이 낯설고 귀찮고 두려워 나중에 나이 들면 들어가 살자는 계산으로 남겨 두었다. 물론 그때의 '나이 들면'은 은퇴를 생각한 것이었지만 어느덧 은퇴를 준비할 나이가 되었다.


교통 편리하고 주변 생활 편의시설이 넘쳐나는 도심 아파트에 사는 것과 수도권 소도시의 단독주택에서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었다. 출퇴근 시간이 늘어나 무척 힘들어지고 편의 시설에서 멀어져  이런저런 것들이 아쉬울 것이다. 그래도 이제 조금 한적한 삶의 터전에서 자연과 좀 더 가깝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사하던 날, 이사회사의 사다리 차가 우리가 살던 8층 창문에 연결되고 짐을 내리는 것을 1층에서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우리가 '땅'에서 산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열심히를 외치며 달려 나갈 힘을 얻은 곳이었지만 언제나 허공에 떠 있었던 공간이었다.


조금 더 불편한 것은 많겠지만 이제 땅을 딛고 실제 공기를 느끼며 지내게 된다는 사실이,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제 나는 그럴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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