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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선 Dec 03. 2019

외냥이 쏘니

산남일기 #20

어느 날 깡마르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작고 못난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달건이의 손자뻘 되어 보인다. 사실 꼭 닮았다. 그래서 이름을 '손이(=쏘니)'라고 붙여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항상 1미터의 거리를 유지하는 다른 냥이들과 달리 쏘니는 옆으로 다가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사료를 먹을 때면 척추의 뼈가 그대로 드러나, 동네에서 가장 마른 길냥이었다. 아무래도 어리고 여린 녀석이라 우리 식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는데, 우리 아들이 오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놀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이 녀석의 문제는 다른 고양이들에게는 '이방냥'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집은 스노우파들의 구역이었으나 쏘니는 이 그룹에 속하지 않았다. 저쪽에서 스노우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며 신음소리를 내고 도망갔다. 스노우는 한 참을 노려 보다가 이 녀석이 키 작은 나무 숲으로 숨어 있는데도 기어이 그 틈을 파고들며 쏘니에게 으르렁댄다. 앞 발을 들어 때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마당 한편에서 심하게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는 어스름 아침이 시작되기 전, 쏘니의 신음소리가 울려 잠을 깼다.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스노우가 녀석을 혼내고 있었다. 작고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격이니 당연히 우리는 스노우를 혼냈다. 스노우 또한 집요하여 우리가 "하지 맛!"하고 소리 지르면 우리를 피해 뒤 쪽으로 녀석을 공격한다. 기어이 쫓아내고서야 평온을 되찾는다. 내가 뭐라 뭐라 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해맑은 얼굴로 나를 보며 "냐옹~!" 거린다.



토요일 오전, 남편과 아들이 뒷 산에 오르고 나 혼자 있는데 스노우가 왔다. 사료를 먹는 스노우에게 가다랑어 간식을 잘라 주며 애원했다.


"스노우, 예쁜 스노우야~! 작고 불쌍한 쏘니 좀 봐주자... 그냥 밥이나 편하게 먹게 해 줘. 알겠지~?"


밥을 챙겨 주며 내가 아부까지 해야 하는 건지... 암튼 스노우는 똘망한 눈을 내게 맞추며 "냐옹~!" 하고 답을 했다.


그것이 긍정의 신호라고 믿은 내가 바보였다. 내가 준 간식을 다 먹고 곧바로 스노우는 쏘니를 찾아 한바탕 엄포를 놓았다. 결국 쏘니는 왼쪽 발을 절룩이며 도망갔다.


한참을 스노우를 노려 보았지만,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양이에게 측은지심을 바란 것은 무리였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스노우파 일당들은 불쌍한 쏘니를 보며 으르렁댔다. 쏘니는 같은 길냥이면서 눈칫밥 먹는 신세였다. 어쩔 수 없이 틈나는 대로 식구들이 돌아가며 쏘니가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보초를 섰다.


지난주 우리 가족이 여행으로 며칠 집을 비우게 됐다. 고양이 사료는 옆집에서 챙겨주기로 했으나 아무래도 그동안 쏘니가 걱정됐다. 스노우파의 공격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그런데 며칠 후 돌아왔을 때 다행히 쏘니는 우리 집 화살나무 아래를 아지트 삼아 버티고 있었다. 기특한 녀석. 못 본 사이 우리가 그리웠던지 벌러덩 드러누워 애교를 부렸다. 남편과 아들은 거의 넘어갔다.


하지만 스노우파와 휴전을 맺은 건 아니었다. 그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쏘니는 그저 폭행을 당하며 견뎌냈던 것이다.


스노우파의 괴롭힘에 설상가상 날씨도 추워지니 쏘니를 향한 애처로움은 더욱 쌓여만 갔다. 급기야 쏘니를 집 안으로 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심각하게 이뤄졌다.


어느 날은 스노우에 맞고 (-_-) 낑낑 거리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내가 쟤를 들이자고 씩씩 거렸고 (그럴 때면 남편과 아들이 말렸다), 날씨가 추워져 오돌오돌 떨며 드나들 때마다 집으로 들어 오려는 녀석을 막아서다가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남편과 아들이 아무래도 쏘니를 집에서 키워야 할 것 같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다음 날, 해와 함께 이성이 다시 하늘에 뜨자 그 다짐을 접었다. 아직 우리 식구 모두 (특히 나) 본격적으로 집사를 하기에 준비가 안됐기 때문이다.


몇 달 안된 고양이 집사 생활에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스노우파와 쏘니의 끝없는 전쟁 중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차라리 고양이 밥 주기를 끝내고 집사 생활에 마침표를 찍어야 할는지. 혹은 쏘니를 건강검진 후 집에서 키워야 할지... 이도 저도 결정 못하고 매일 싸움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쏘니는 조금 살도 붙고 몸집도 커졌다. 겨울 한파를 이겨내면 좀 더 멋지고 당당한 냥이로 성장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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