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일기 #21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이면 우리가(=내가) 좋아하는 좋은 와인을 나눠 마시곤 했다. 어떤 때는 여행지에서, 또 어떤 경우에는 와인과 어울릴 만한 좋은 식당을 찾기도 했다.
결혼기념일이 가까워 오면 이번에는 어떤 와인을 마실지 얘기 나누는 것으로 준비를 시작한다. 가진 와인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그다음에 어디에서 어떤 음식과 함께 먹을지를 정한다.
젊었을(? -_-) 때는 결혼기념일에 맞춰 평소 잘 가보지 못했던 고급 레스토랑을 검색하느라 시간을 썼다. 오마카세 일식당을 찾기도 했고 스테이크가 맛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하기도 했다.
올해는, 와인을 집에서 마시기로 결정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시골로 이사를 와서 와인을 마시고 대리를 불러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너무 번거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훌쩍 자란 아들과 함께 하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다. 한 동네에 사는 선배님 부부도 초청했다. 이사 온 후 텃밭 가꾸기부터 여러 가지를 지도해주시는 '쓰앵님'으로 우리에게 전원생활의 기쁨을 선사하신 분들이었다.
원래 결혼기념일은 12월 9일이지만 월요일이니, 하루 전날에 와인을 마시는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일요일 저녁 상을 차리느라 오후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스테이크를 굽고 버섯, 아스파라거스, 양파 등 야채도 구워 함께 담았다. 지난해 파리에서 먹어본 맛을 기억해서 치즈를 넣은 매쉬드 포테이토를 만들었다. 돈까스소스, 케첩, 레드와인을 이용해서 스테이크 소스도 만들었다.
상을 차리고 보니 그럴듯했다.
(하지만 사진 찍는 걸 잊었다. 이런이런... 뒤늦게 찍은 한 장의 사진)
올해의 와인은 [몰리두커 인챈티드 패스 2016 빈티지] (관련 정보 http://www.thevincsr.com/portfolio_page/18310/). 호주 특유의 카버네 쇼비뇽과 시라즈를 블렌딩 한 와인이다. 부드럽고 묵직하고 향기로운 맛을 모두 낼 줄 아는, 놀라운 아이였다.
알고 초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 '쓰앵님'의 생일이었다고 했다. 생일 축하와 결혼기념일 축하가 더해지니 자리는 더욱 흥이 났다.
당연히 와인 한 병을 더 땄다. 우리 부부가 정말 좋아하는 나파밸리 와인, [조셉 펠프스 2016]. (관련 정보 https://www.wine21.com/13_search/wine_view.html?Idx=156761). 미국 + 카버네 쇼비뇽 와인의 전형이랄까. 언제 마셔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든든한 맏아들 같은 와인이다.
이십구 년을 함께 살았다. 미슐랭 어쩌고 식당이 아니어도 맛있는 음식을 차리고 축하할 와인도 고를 수 있고, 성장한 아들이 함께 하고, 또 즐거움을 나눌 이웃도 있다. 뭐 이쯤이면 되었다 싶다. 이제부터는 인생의 하산길이 본격적으로 열릴 테지만 뭐 그래도 괜찮다. 사실 오르는 길에 있었던 그때가 부러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인생의 정점을 찍었고 이제 내려가는 일이 남았다는 것을 알고부터 더 차분해지고,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내년에도 몸과 마음이 이 정도만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