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 데이비드 실즈
평범한 일상에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일은 많지 않다. 젊은 사람이라면 아마 더욱. 죽음은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겐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정해진 운명이다. 인간이 숫자로 치환 가능한 사회에서 죽음은 항상 비극이어야 하며, 슬픔의 전당에서 기려져야 한다. 죽음에 대한 언급은 암묵적으로 금지되며 터부시 된다. 죽음은 예쁘게 포장해놓은 사회에서 감춰지고 숨겨지고 은밀한 것이 된다. 몇 개월 전 야심한 시각에 내가 사는 아파트에 구급차와 경찰차가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야밤에 시끄럽게 뭐람 하고 이내 다시 잠들었다. 며칠 후 아파트 단지를 지나가다 삼삼오오 모여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집에 살던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사람이 살면서 죽음을 실제로 목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본인이 사고를 당할 확률만큼이나. 보통 가족의 사망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피부로 느낀다. 어제까지만 해도 대화를 했던, 같이 시간을 보낸 사람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모습은 이질적이고 기괴하게 느껴진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것에 대한 무력감과 회한으로 감정이 요동친다. 현대 사회가 죽음을 통제하는 방식은 그것을 목도했을 때의 감정의 낙차를 몇 갑절 증폭시킨다. 하지만 죽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늘 일어난다. 그림자처럼 신경 써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하게 훅 지나가 버린다. 내가 타자를 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 죽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평균 서른 세명이 자살한다.
제목에서부터 도장을 쾅 찍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책은 기묘하다. 역자의 평처럼 이 책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아버지에 대한 애증,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신체의 변화에 대한 수많은 통계, 그리고 죽음을 경험한 혹은 그것에 대한 유명인들의 말말말 까지. 작가는 노년을 나이에도 왕성한 육체활동을 벌이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저주한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좋아하지만 일반적인 나이라 보기 어려운 신체 활동을 보며 작가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정해진 결말을 받아들이는 굳은 다짐처럼 느껴진다. 아흔이 넘어 죽음에 매우 가까워진 아버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해졌다. 절대 꺾일 것 같지 않던 그의 육체와 정신이 약해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회한은 이미 지천명을 넘긴 작가가 자신의 결말 또한 상상하게 한다.
작가가 공들여 조사한 생의 과정에 대한 통계는 흥미롭다. 유전자를 퍼트리라고 단호히 지시하는 DNA에 각인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은 10대에 이미 주어진 미션을 수행할 모든 준비를 마친다. 그것의 성패 유무에 관계없이 정상에서 서서히 하산을 시작한다. 아흔이 넘은 아버지와 십 대 소녀인 딸 두 사람을 바라보며 느끼는 작가의 심정은 복잡다단하다. 노인이 돼서도 왕성했던 체력과 성욕 그리고 육체의 화신 같아 보였던 아버지가 자신의 무력감에 벌벌 떨고 눈물 흘리는 나약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자식으로서도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미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자신의 몸과 더불어 이제 막 신체의 정점에 오른 딸의 모습은 삼대로 이어지는 어떤 생명에 대한 근원적 신비함을 느낀 게 아닐까.
나는 서른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주제에 이제껏 죽음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해왔다. 불행한 가정사와 빈곤, 그리고 높은 이상, 낮은 자존감은 우울이라는 늪으로 나를 계속 빠지게 만들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처럼 주변 모든 것을 아니꼽게 보고 저주했다. 홀든한테 피비가 있었지만 나에겐 그것도 없었다. 다행인 건 인간관계가 좁아진 턱에 외로웠고 외로워서 나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외로워서 책과 영화를 악착같이 붙들었다.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나라는 인간이. 조그만 강아지가 오히려 더 크게 짖어대는 것처럼 나는 무척 외로웠고 죽는 게 무엇보다 두려웠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마시는 드립 커피와 재즈를 음미하는 몇 분, 헬스장에서 스마트폰을 락커에 던져둔 채 한 시간 남짓 내 몸의 자극에 집중하는 시간, 나처럼 우울에 사로잡혀있는 것 같은, 하지만 지금도 열심히 제 안의 뜨거운 불덩이를 글로 토해내고 있는 사람들의 것을 보는 시간이 소중해졌다. 하루키처럼 글은 쓸 수 없을지언정 그의 글을 읽고 피식 거리며 그가 말한 소확행을 즐기고 있다. 이 즐거움이 언제 끝날지는 나도 모른다.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끝이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답다. 스포츠도, 이야기도, 인간의 삶도 그렇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태생적으로 반골인 나는 많은 이들이 죽음을 생각하길 바란다. 자주는 말고 가끔. 매년 초 계획을 세우고 연말엔 실패를 반성하는 이에게는 더욱. 가끔은 어두운 구멍을 통해서 더 멀리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