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하지 말라
내가 아는 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엄청나게 노력한 사람들이다.
한편으론 이런 점을 들어, 희망을 잃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죽도록 열심히 해 봤냐?"
라며 다그치는 사람들이 있다.
'노력',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은 너무 쉽게 오남용 되고, 또 잘못 받아들여진다. 그러다 보니, '죽도록 노오오력'하라는 말이 꼰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도 노력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노력은 중요한 가치임은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한, 좋은 노력과 꼰대의 노오오력은 무슨 기준으로 나뉘는가?
나는 여기서 '죽도록 노력하라'라는 극단적 표현을 통해 노력의 본질을 찾아보려 한다.
죽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인가?
'죽도록 노력'한다는 말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다.
죽도록 해봤어?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는 사람은 부모님 혹은 선생님이다. 당신이 진짜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이 중 한 명도 없다. 이들이 하고자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들 육체적으로 고생하는 것이 노력이라고 받아들인다. 예컨대 학생은 삼일 밤을 새우고 공부하거나, 운동선수들은 기절할 때까지 뛰거나 하는 것들을 해야 비로소
"아, 저 놈 죽도록 노력했네. 졌잘싸야 졌잘싸"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이건 우리 사회가 가진 오만하고 소모적이며 멍청한 시각이다. 우리가 뭐라고 타인의 노력을 재단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도록 노력하라는 말은 다른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이다.
노인과 바다에서, 84세의 노인 산티아고는 큰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로 떠난다. 낡은 배에 늙은 몸을 실어 바다에 나가는데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84일 동안 허탕을 치고, 85일째 되는 날 3일 밤낮 동안 온몸으로 싸워 거대한 청새치를 낚는 데 성공한다. 그 청새치를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그의 유일한 존재 목적이 된다. 그 청새치는 산티아고 노인의 정체성이다.
바다는 녹록지 않다. 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매일같이 수많은 상어들이 청새치를 뜯어먹으러 달려든다. 늙은 몸뚱이와 작살 하나로 배 위로 달려드는 상어들을 죽여도, 다음날 더 많은 상어들이 와서 청새치를 뜯어먹는다. 결국 집에 도착했을 때, 노인의 배에 매여 있는 것은 청새치의 앙상한 뼈뿐이다. 이 노인의 이야기를 읽고,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무릅쓰는 노익장을 대단하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노인이 살고 싶었으면 청새치를 버리면 될 일이었다.
이 노력은 분명 그의 자신의 의지이며 선택이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이 책이 말하는 진정한 노력은 삶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의지, 소망에 대한 노력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모두 투영한 그 거대한 청새치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는' 그 의지가 이 책을 세기의 명작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린 어차피 죽는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어떻게 살 것이냐'와 같다. 산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소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선택에서 나온 노력이 진정 의미 있는 노력이 된다.
그러니, 노력, 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하지 말자.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