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이가는 Jan 10. 2020

남편의 취직

남편은 오늘도 출근했다. 

밤에 한잠도 이루지못하고 뒤척이다가 아침에도 몇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하고서야 길을 나섰다. 

축처진 어깨와 시무룩한 표정을 애써 숨기며 씩씩한 척하며 그렇게 출근했다. 


지원했던 한국의 한 기관에서 최종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모든 학생들과 연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그헣겠지만, 남편 또한 학위과정동안 한 곳만을 바라보며 달려왔다. 연구소에 간이 침대를 놓고 쪽잠을 자고,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는 생활을 5년이상 버티며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의 목표때문이었다. 

'정규직 연구원' 


연애하던 시절 우연히 남편의 메모장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간절한 기도제목이 적혀있었다. 당시 남편은 여려 기권을 지원했다가 낙방의 고배를 연거푸 마셔 굉장히 낙담해있던 상태였다. 대충 '하나님, 저에게 평생 감사할 수 있는 연구직 자리를 주세요.' 라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 사람이 이렇게 간절하게 원하는구나를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애초에 독일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이었다. 독일에 가서 열심히 연구 실적을 내고 한국으로 들어와 연구원으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렇기때문에 독일의 계약기간이 만료되기전에 빨리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야한다는 압박감이 늘 남편에게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한번도 남편의 계약직에 대해 문제삼지 않았다. 이 남자의 천성을 굳게 믿은 것도 있었고, 당장 우리가 먹고 살 양식과 쉴 집이 있다면 그것또한 감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입장은 달랐다. 가정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감이 있었고, 또 그간 자신이 공들인 시간과 논문이 가치있는 연구라는 것을 증명을 받고 싶어했다. 하지만 요즘같이 취업난이 심한 시대에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는 많지 않았다. 자리가 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기때문에 어느 자리든 나기만하면 지원을 해야 했다. 되고 안되고는 후에 문제니까. 


문제는 박사급 연구원 채용은 서류준비만해도 아주 까다롭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 실적에 관한 요약본과 증빙자료가 있어야하고, 또 자기소개서와 업무수행 계획서의 분량도 무시할 수 없기때문에 한번 지원을 했다 하면 몇날 몇칠은 밤을 새워 준비해야했다. 그런 남편의 노력을 알기때문에 지켜보는 나로써는 결과가 발표되는 그날이 조마조마하고 그렇게 긴장이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씩씩하게 길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매번 여유롭게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라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아니 빠른 시일 내로 얼른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다. 남편을 위해 할 수 있는게 기도밖에 없었다. 간절하게 좋은 결과를 위해서 기도했고, 혹시 그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감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실눈을 뜨고 홈페이지에 한번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지금 오후니까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00 채용 최종 결과 공지"라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올린 시간은 금방인지 아직 조회수가 3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얼른 클릭을 해봤는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남편의 이름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어느 곳에 합격했을때도 이렇게까지 기쁘지 않았는데, 정말 감사했다.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나섰던 축 처진 남편의 어깨가 오버랩되면서 얼른 이 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제 남편이 자신이 걸어온 학문의 길을 원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작은 열매지만 이제 결실을 맺었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그리고 다급한 손길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합격했어!!!!" 


전화를 받은 남편은 벌쩍 뛰며 얼른 확인을 해보았다. 

두번 보고 세번 봐도 합격이었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에 벌써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상상을 했다. 이제 우리는 말이 통하고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부모님께 시차를 걱정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도 되고, 마음막 먹으면 주말에 잠깐 다녀와도 되는 그 곳으로 간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첫 단추를 끼웠다. 독일에 간지 6개월이 조금 넘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금, 가장 찬란한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