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생존방식이 나를 더이상 지켜주지 못하는 경계선에 닿다
매해가 가기 전에는 늘 그 해의 회고를 적고는 했는데 2025년에는 그러지 못했다. 11월부터 느껴온 낯선 느낌 --모든 것에 압도되는 느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손이 이상하게 안 뻗어지는 느낌, 얼른 힘내서 해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기 싫은 느낌, 나 스스로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드는 느낌이 계속 됐다. 모든 것에 대해 부채감을 느꼈고 내가 그 부채를 갚을 수 있을리는 없다고 느껴졌다. 몇 가지 사건들을 지나며, 내가 생각과 주관이 없고 남의 말을 너무 잘 듣는 사람 같아서 화가 났다. 내가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같이 보일까봐, 아니 실제로 내가 그런 생각없는 꼭두각시알까봐, 내가 의지를 갖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일까봐, 내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가버린 걸까봐, 이제는 저무는 일만 남은 걸까봐 조바심이 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해야 하는 일은 새롭게 쌓여갔고 새해도 찾아왔다.
1/ 뉴욕으로 이사를 왔다. 흥미롭게도 새로운 곳에 왔다는 흥분감 보다는, 내가 알던 곳, 내가 익숙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정감이 지배적이다. 그러면서 익숙한 불안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내 삶을 최대치로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 다시 올라왔기 때문이다.
2/ 미국에 온 뒤 사실상 처음으로 대면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전적으로 remote였는데 말이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구나 생각했다.
3/ 그 어떤 때보다 내 주변의 친구들, 연인, 가족들에게서 안정감을 크게 느낀다. 나는 인생이라는 게 다리가 세 개인 원형 테이블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 내 개인 서포트 시스템이 하나의 다리, 일이 또 다른 다리, 내가 구축해놓은 시스템과 루틴이 또 다른 다리이다. 내 근거 없는 낙관은 그 세 개 중 두 개가 함께 무너지는 법은 없다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이제 내가 개인적 삶에서 안정되니까 일이 말썽이다.
4/ 여러 가지로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이제 더 이상 기능하지 않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가 성과를 내 온 방식은, 아주 깊이있게 파고 들어가서 직접 원인 분석, 해결책 등등을 설명하는 문서도 쓰고 뭔가 직접 손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누군가한테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 근데 이제는 그렇게 해서 갈 수 있는 최선까지 와버렸달까. 이런 식으로 일하기에는 몸이 몇 개 더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말하자면 이 방식으로는 더 이상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는 곳까지 성장해 버렸다. 다른 사람을 조금 더 믿고 새로운 방식으로 일해야 하는 때가 왔다.
행복을 느끼는 것도 능력이라는 걸 이제서야 알게 됐다. 나는 행복을 느낄 줄 모른다. 객관적으로 좋은 일이 있을때, 예를 들어 승진했을 때도 솔직히 기쁜 적은 없었다. 그냥 너무나 당연히 받아야 하는 걸 받은 느낌이었다. 자랑스럽게 어깨를 약간 으쓱하는 정도. 내게 있었던 많은 칭찬과 좋은 일들도 예외는 아니었고, 이런 일들 앞에서 나는 늘 무감각했다. 나에게는 나의 존재 만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를 보면 행복을 감각한다는 것 자체가 능력임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다.
내 개인 시간을 갈아 넣어서 자기 개발에 쓰는 게 이제 더 이상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못 하게 됐다. 그냥 피곤하다. 내 생각은 '잘 보낸 하루라는 느낌은 빈틈 없이 성실하게 뭔가를 계속 해 낸 날'에 멈춰있는데, 내 몸은 이제 과거의 내가 했던 만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일차원적 근면성 기대치를 맞춰줄 수가 없다.
내 친구들은 이제 자기를 조금씩 알 것 같다고 하던데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전혀 모르겠다. 내가 나를 안다고 생각했던 때는, 내 세상에 불안 밖에 없어서 나 자신에 대한 읍소도 불안에서 나오는 것임을 몰랐던 때 뿐인 것 같다.
4/ 역할 모델이 많이 흔들렸고 자꾸 나로 하여금 생각해보지 않아도 됐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다시 한국으로 가서 살게 되면 어떨까, 내가 일을 안 하는 삶을 살게 되면 어떨까... 이런 것들.
내가 존경하고 더 성공하기를 바랐던 리더는, 내가 그의 승진 가도 위에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사이코패스가 뭔지 보여줬다. 그의 요청에 이성적임이란 없었고 사람들은 화가 난 그를 달래기에 바빴다. Corporate America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는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걸까 고민스러웠다.
나를 가장 옆에서 믿음과 애정으로 이끌어주는 동료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지 못해 힘들어했다. 그는 26년차 직장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직업에 온전히 기대어 있음을 깨닫고 이제 조만간 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올 텐데 그렇다면 그때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한다. 그의 고민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나도 생각이 많아졌다. 난 기회가 된다면 70살까지도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6년의 열흘이나 지나버린 지금도...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다음은 뭘까를 알고 싶어 온갖 유사과학을 다 뒤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올해도 언제나 늘 나답기로 해... 화이팅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