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전공 한답시고 몇 백 년 전에 작곡된 음악만 공부하며 최신 음악에 소홀했던 것 아닌가라는 성찰을 하던 요즘이었다.
분석 철학을 공부하는 지인이 요즘 관심 있게 듣는 노래라면서 인공지능 케이팝 '반야심경'이란 제목을 가진 AI 케이팝 곡을 공유하였다.
제목을 들었을 때 불교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되는 음악인가 싶었고 역시나 불교 교리를 가사 삼은 노래였다.
나는 이 노래를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II. 본론: AI 케이팝 '반야심경'은 도대체 어떤 작품인가?
1-1. 음악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내가 음악을 공부하며 가장 많이 한 작업 중 하나는 여러 음악을 기준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그 기준이란 장르, 악기, 지역, 양식, 계급 등 아주 다양하다.
이때 음악을 분류하는 기준은 아무렇게나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의 특징과 사람들은 그 음악을 어떻게 듣는지를 섬세하게 파악해 세워야 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사람들이 음악을 어떻게 분류하는가?'를 보면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시 여기는지 알 수 있다.
1-2. 서양 중세 음악의 예시: 종교(전례, 비전례), 세속
내가 요즘 공부하고 있는 서양 중세를 예를 들면 이 시대는 기독교가 사람들의 생활 일반과 음악 수용 맥락에도 미칠 만큼 종교가 중요한 때이다.
그렇기에 이 시대 음악을 분류하는 데 있어서도 이 종교와 연관이 있냐 그렇지 않냐로 종교 음악, 세속 음악으로 나눈다.
종교 음악은 그중에서 종교 의식에 직접 쓰이느냐 아니냐에 따라 각각 전례 음악, 비전례 음악으로 나뉜다.
즉 비전례 음악은 종교적 메시지는 다 담겨져 있지만 의식에 직접 쓰진 않으며 대표적으로 포교 목적 음악을 들 수 있다.
1-3. AI 케이팝 '반야심경'은 그래서 종교음악인가? 세속음악인가?
여기서 말하는 종교 음악, 전례 음악, 비전례 음악, 그리고 세속 음악 분류 틀을 기독교에 한정하지 않고 불교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이 음악을 분류해 보자.
일단 적어도 이 작품은 전례 음악은 아니다. 스님의 설법 절차에 이런 음악이 쓰인 건 못 봤다.
그렇다면 이 음악은 비전례 종교 음악이거나 세속 음악 둘 중에 하나일 텐데 관점에 따라서 비전례 종교 음악으로 볼 수도 있고, 세속 음악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비전례 종교 음악이냐 세속음악이냐를 따지는 데 있어 작곡가의 의도, 작품의 특성, 감상자의 영향, 불교 내부자의 입장 등을 고려해 판단하겠다.
뤼튼으로 뽑은 부처 AI 이미지
2. 종교음악(비전례)으로 보는 입장
해당 작품을 비전례 종교음악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1. 작품, 작곡가, 수용자의 측면
우선 이 작품은 불교 교리와 관련한 가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작곡가가 불교에 종교적 믿음을 갖고 임하는 건 아닐지라도 불교 교리의 전달을 의도하고 집어넣은 것이다.
또한 감상자가 이 음악을 듣는 것을 계기로 불교 교리에 관심을 갖거 입문하여 불교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종교음악으로 볼 여지가 있다.
2-2. 내부 당사자의 입장
한편 종교 음악을 분류하는 데 있어서 음악적 특징뿐만 아니라 그 종교를 믿는 내부 당사자의 입장을 들어보는 것도 중요하다.
서양의 음악학자들은 서구 클래식 음악의 기원이 성경을 낭송하는 '그레고리오 성가'인 점을 고려해 이슬람교의 코란 낭독음 역시 일정한 음악적 요소와 종교 경전 내용의 가사를 담기에 종교 음악으로 분류 했으나 이슬람교도 당사자들의 음악관에 따르면 음악의 범위는 세속을 전제로 하기에 '내부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해 종교음악으로 보지 않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대 한국 불교계는 비교적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가지는 매체에 대해서도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다면 폭넓게 수용하는 편인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불교계 내부 당사자 입장에서 이 음악을 종교 음악으로 충분히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
3. 세속음악으로 보는 입장
이 음악을 세속 음악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3-1. 작품, 작곡가, 수용자의 측면
해당 작품은 비록 불교 교리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작곡자는 불교의 종교적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에게 있어 이 작품 가사 속 교리 내용은 불교라는 종교의 이미지를 소재로 사용한 것일 뿐이다.
물론 이 음악을 듣고 불교 교리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할 수 있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정말 이 음악을 들은 것을 계기로 불교에 입문한 것인지, 혹은 애진작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입장에서 이 음악에도 관심을 가진 것 아닌가'? 생각해 봤을 때 진지하게 이 음악이 한 사람의 불교로의 귀의에 영향을 주는 데이 큰 의미를 가질지 의문이며 설령 이 음악이 누군가의 불교로의 귀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들 그것이 이 음악을 종교 음악이라고 볼 만큼의 근거가 될지는 의문이다.
3-2. 내부 당사자의 입장
더군다나 아무리 한국 불교계가 비교적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가진 매체에 수용적인 면이 있다고 한들, 몇 달 전 찬불가에 EDM을 붙혀 노래 부르던 뉴진스님이 불교 근본주의 국가 말레이시아에서 입국을 거부당하고 그의 음악을 불교에 대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보수적인 불교계 에서는 이런 형식의 음악을 종교 음악이라고 보진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덧붙여서 이 음악은 AI를 통해서 제작된 음악이다. AI 작곡의 원리는 기존의 여러 음악을 대량으로 학습하고 이를 조합시켜 나름의 산출물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음악의 소리 구조를 보고 추정컨데 기존의 불교 종교 음악을 대량 학습한 것이 아닌 동시대 한국의 대중 음악을 학습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곡가가 종교음악으로 이 작품을 제작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기존 종교 음악 작품의 양식이나 가사를 AI에 학습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세속음악인 한국 대중음악을 학습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종교 음악보다는 세속 음악에 가깝다는 데에 더욱 무게를 싣는다.
III. 맺으며: AI 케이팝 <반야심경>이라는 음악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상으로 AI 케이팝 음악 <반야심경>을 비전례 종교 음악으로도, 세속음악으로도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작품, 작곡가, 수용자 그리고 불교계 내부 당사자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음악을 다루는 여러 행위자 가운데 수용자를 중요시 여긴다. 이 음악이 세속 음악이냐 비전래 종교 음악이냐 가르는 데 있어서 해당 작품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점점 더 종교 음악에 가까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음악이 사회 내에서 어떠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지를 주목해서 음악을 분석하는 편인데, 아직은 이 음악이 포교의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보기는 힘들고 오히려 여흥과 오락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작품은 세속음악이라고 생각한다.
IV. 덧붙이며: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의 경계선은 뚜렷한가?
종교와의 관련성을 기준으로 나눈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의 경계선은 관행적으로 오랫동안 쓰인 기준인 만큼 뚜렷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경계가 모호한 음악이 여럿 존재한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종교 음악에 종교색이 빠지면서 세속 음악화되는 사례도 살펴볼 수 있는데 서양 음악사에 있어서 '모테트'라는 장르는 탄생 초기엔 '종교음악'이었다가 세속적인 가사 내용이 붙으며 '세속음악'이 되었고 다시 종교적 가사가 붙으며 '종교 음악'이 되었고, 국악의 경우 불교적 가사를 가진 성악곡 '영산회상'이 가사가 탈락되며 기악음악이 된 채 아마추어 음악문화인 풍류음악의 대표곡이 되었다.
한편 무당들의 굿 의식에서 수행되던 무속 음악이 판소리로 변용되기도 하였으며, 오늘날 미국 대중음악 역시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흑인 교회 영가라는 종교 음악이 나온다.
반대로 세속음악에 종교적 가사가 붙어 종교음악이 된 사례도 있는데, 루터교는 당대의 세속 유행가에 종교적 가사를 붙혀 사람들이 쉽게 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코랄'을 창시하며 새로운 예배문화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하나의 음악이 단일한 쓰임새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능과 역할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가 'AI 케이팝 <반야심경>이 과연 세속 음악인가? 종교 음악인가?'란 질문을 던지며 그 경계를 모호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음악사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의 흐름 속에 이 시대가 놓여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