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Oct 08. 2022

다시 찾게 된 목표

좋아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2018 자기소개서

다시 찾게 된 목표

미용에 도전했던 9월이 끝나고 다시 한번 테스트 자동화 엔지니어 커리어를 쌓고자 새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익숙한 언어와 테스트 프레임워크 보단 새로운 언어와 테스트 프레임워크를 배웠다. 이 분야에 남아있는 열정의 깊이를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깨끗하게 맑아진 머릿속에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고 싶었다. 지난 회사에서 단기간에 많은 것들을 경험한 덕분에 올해 1월 테스트 자동화 실무를 처음 했을 당시보다 경험면에서나 스킬면에서나 많이 성장했다는 걸 느꼈다.


새로운 길을 시작하고 1달도 안되어서 포기했을 때 처음에는 스스로에게 많이 창피했었다. 맨 정신으로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의 끝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새로운 길을 응원해주셨던 미용 분야의 원장님들과 헤어 스텝 그리고 디자이너분들께 끝내 아쉬운 소식을 전하고 하염없이 미용 가위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었다. 

20대 초반 직장 생활을 준비할 무렵 가위를 잡은 친구들은 어느덧 원장님이 되었다. 나도 30대 후반에는 너네들처럼 멋진 원장이자 헤어디자이너가 되겠다며 포부를 건넸지만 지키지 못했고 친구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창피했다. 덤덤하게 다한증이면 당연히 힘들 거라는 위로에, 앞으로의 또 다른 길을 응원한다는 얘기에, 창피하면서도 고마웠다.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들의 응원은 그 자체로도 값지고 살아가면서 때로는 큰 힘이 되어준다는 걸 퇴사 후에야 느끼고 배웠다. 내 길이 아니란 걸 몸소 느꼈을 때의 빠른 포기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한증으로 1년 2년 5년을 버틴다 한들, 내 뒤에 놓인 풍경이 벼랑 끝에서 넓은 평야로 바뀔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다시 한번 커리어를 시작하게 도와주려는 SW QA 엔지니어 분들을 통해서 보다 수월한 구직 활동이 기다려질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는 생각과 함께, 다가올 30대는 좋은 인연들과 순간들을 계속에서 이어가고 지켜내고자 보다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함을 잊지 않도록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정신적으로 보다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지내는 요즘이다. 


문득 4년 전 게임 QA로 커리어를 쌓아갈 당시 작성했던 자기소개 PPT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다시 보니 괜스레 낯간지럽다. 저러한 목표와 포부가 있다면 일단 실행에 옮기고 결과를 만들고 나서 해냈다는 결과를 통해 목표와 포부의 과정을 얘기하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으론 내가 왜 그동안 SW QA 분야에서 하고자 했던 목표들을 끝맺음하지 못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4년 전 서툴었던 나는 QA 경력 10년 차인 33살에 QA 서적 출판을 하고 싶었다보다. 아직 4년이나 남았다. 4년 전과 지금의 모습도, 1달 전과 지금의 내외적인 모습도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더 이상 보컬도 미용도 내 길이 아니란 걸 확실히 느꼈고 SW QA 분야에서의 무언가를 할 때에 행복했었구나 라는 것을 많이 느꼈다. 친구 가족 연인 관계에서 오는 소중함도 다시 한번 느꼈다. 


앞으로의 SW QA 커리어와 다가올 30대는 정말 묵묵히 조용히 가고자 하는 길을 쌓아보려 한다. 무언가를 해내기로 했을 때 무수히 많은 과정들을 굳이 응원받고자 애쓸 필요가 있을까, 너무 지치고 힘이 들 땐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친구 가족 애인에게 터놓고, 불필요한 연민 섞인 감정의 과정들은 절때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과 삶을 확실히 구분하고, 결과를 통해 지나온 과정을 자연스레 비추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서툴고 부족했던 내 모습들을 또다시 흘려보낸다.


좋아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지난 8월 어릴 적 나만 알고 있었던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위해 미용 헤어 주말반을 시작으로 퇴사를 했었다. 20대 초반 미용을 시작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원장님이 되었고 나도 앞으로 5년간 헤어 스텝과 초급 디자이너 생활을 마무리하고 20대에 모아둔 돈으로 내 샵을 차려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다. 하지만 몸소 경험 끝에 나는 미용을 직업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값비싼 수업료를 통해 배웠고 마지막 남은 미련 가득한 꿈이 지워졌다. 

첫 번째로 지운 꿈은 보컬이었다. 보컬을 배우고 싶어 연고 없는 서울로 20살에 독립했었다. 당시 라이브 아미라는 유명한 보컬 학원에 다녔었다. 나는 어릴 적 락 타운과 하비넷과 같은 음악 커뮤니티 사이트를 보며 자랐기에 라이브 아미와 같은 특색을 지닌 보컬 학원을 다니는 것은 당시 나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학원비를 벌기 위해 저녁 야간 이자카야 홀 서빙 아르바이트를 어쩔 수 없이 했어야 했다. 새벽 마감인지라 다음날 학교 수업에 지장이 생겼다.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수업 시간엔 밀린 잠을 잤었고 보컬 학원에 집중했었다. 꿈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목이 너무 상했었다. 10대와 20대 초반의 목소리와 지금은 너무 많이 달라졌다. KCM을 좋아했다 보니 10대와 20대 초반까지 안 되는 목소리를 억지로 내려고 애썼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보컬은 이번 생에 할 수 없다는 걸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20대 중후반이 되어서도 자꾸 미련이 남아 내가 노래를 얼마나 못하는지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싶어졌다. 유튜브를 개설하고 코인 노래방에 가는 날마다 핸드폰으로 촬영 후 업로드하였다. 189개를 업로드했었고 구독자는 60명까지 올라갔다가 현재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더 이상 노래를 부르기 힘들 정도로 성대가 많이 상하는 바람에 2021년 업로드를 끝으로 현재는 1년째 업로드가 중단되었다. 


유튜브를 통해 좋은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안 좋은 얘기도 정말 많이 들었었다. 보컬은 이번 생에 할 수 없다는 걸 몸소 느꼈고 미련 없이 흘려보냈다. 게임회사 재직 당시 워크숍에 갈 때면 노래방에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회초년생 시절 회식 자리에서 항상 2차 3차로 노래방 가자며 얘기했던 모습들도 떠오른다. 이제는 이조차도 못할 정도로 목이 많이 상했고 타인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창피할 만큼 느껴진다. 덕분에 안 되는 일에 미련을 확실히 지우게 되었다.


두 번째로 미련 남은 꿈은 미용이었다. 학창 시절 어머님 생신날 자퇴하겠다며 편지 써두고 학교로 갔었는데, 집에 불려 와서 엄청 혼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가족들과 만나 어린 시절 얘길 할 때면 어릴 때부터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꿈이 참 얄궂었다며 정말 많은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부모님 세대에서의 미용은 인식이 워낙 안 좋은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20대가 끝나갈 무렵 보컬이라는 꿈은 확실히 버렸지만 미용은 자꾸 눈앞에 거슬렸다. 29살이라는 나이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들로 인해 지금이 아니면 도전해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앞으로 최소 5년간 내가 가진걸 모두 포기하고서라도 미용이 정말 재밌고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언젠간 멋진 헤어디자이너가 되어서 그동안의 보상을 모두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빠르면 17살부터 시작하는 미용인들 사이에서 비교적 늦은 나이인 29살에 청담동 톱클래스가 되겠다는 목표와 포부도 없이 주어진 일에 감사하며 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었다. 


1달 만에 다한증은 미용을 직업으로 삼을 수 없겠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말년 병장이 되어서야 다한증이 이렇게 심한데 어떻게 1급을 받았냐는 위로 섞인 얘기와 더불어 당시 육군 규정으로 부여할 수 있는 최대 병가를 받았으니 애초에 도전하면 안 될 직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다한증인 만큼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도전했었지만 끝내 빠른 포기를 하게 되었다. 6개월 1년 2년 5년을 더 한다고 해서, 내 뒤에 있는 절벽이 넓은 평야지대로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때로는 안될 것 같다는 믿음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에서는 빠른 포기가 오히려 더 용기 있는 선택이란 걸 배웠다.


방황했던 20대 

서툴었던 20대

성실했던 20대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태 관리 패키지 Provide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