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여름방학이 이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학기 중에는 피곤해하는 애들이 안쓰러워 얼른 방학이 시작되길 그토록 기다렸는데, 방학이 되고 보니 얼른 개학했음 싶은 건 세상 모든 엄마의 마음일까? 아니면 나만의 마음일까?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참 좋고 감사하지만,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꼬박꼬박 챙기려니 힘든 것도 사실이다.
개학이 다가오니 또 바쁘다.
학교에서 요청한 학용품들을 사고, 또 아이들의 새로운 1년의 학업 계획을 세워야 한다. 예컨대, 사교육 같은 것들 말이다.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학원의 개념이 별로 없다. 특히나 국영수를 배우는 곳은 거의 보질 못했다. 그러나 예체능을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기관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그건 보통 1년 단위로 등록을 한다.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는 않지만, 문화협회 같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을 공략하면 싼 값으로 배울 수 있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특히나 수요일은 수업이 없거나 오전 수업만 하기에, 수요일은 개인적으로 등록한 기관을 찾아 예체능을 배우는 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난 3년 동안 아이들은 매주 수요일마다 한글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올해는 좀 새로운 걸 배워보자는 게 아이들과 나의 합의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동으로 좁혀져 있었다.
그러나 개학이 다가오자 아들은 돌연 수요일은 집에서 쉬겠노라 선포했다.
자신은 운동을 할 때 긴장이 많이 되는데, 프랑스 선생님과 함께 하는 것은 더더욱 긴장이 되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말에 나는 또 속이 복닥거렸다.
그건 운동을 꼭 가르쳐야겠다거나, 사교육을 못 시켜서 안달이 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들이 조금 더 이주한 이 사회 속으로 묵묵히 씩씩하게 뚜벅뚜벅 자신의 힘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애틋한 마음에 더 가까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고 싶은 아들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집에서 문을 열고 마트를 가는 것조차 막막했던 그 시간들, 그래서 나를 자극하는 모든 상황들로부터 나를 격리시켰던 코로나가 도리어 반갑기까지 했던 그 시간들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무엇이라도 해 보라고 권하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행여나 아들이 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주저하다 나가지 않기로 그 마음을 먹을까 두려워 어떻게든 아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거를 움켜쥐고 싶은 조급함이 숨어 있었다.
그 불안함을 애써 밀어 두고,
나는 슬며시 아들에게 물었다.
"그럼 프랑스어를 배워볼래?
하고 싶은 말 다 못하는 거 답답하다며...
그때 엄마한테 그랬잖아. 프랑스인 선생님이 힘들면 한국 선생님으로 찾아볼게."
행여나 내 불안을 들킬까, 조심스레 꺼낸 말들을 건성으로 듣던 아들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에이, 엄마, 괜찮아.
어차피 나 중학생 되면 프랑스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려 다니며 신나게 놀텐데, 뭘 굳이 그러겠어."
아들의 그 말에 나는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어디서 그런 낙관이, 그런 자신이 나왔는지...
아들의 호언장담 앞에 조마조마하고 불안했던 마음도 웃음과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네가 좋을 대로 하려무나."
마음에 남아있던 껄끄러운 감정들을 애써 털어내며 아들의 말을 시원스레 인정해주고 돌아서니,
참말로 아들의 말이 맞다 싶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걱정이 없었던 때는 없었다. 잘 안 먹어서 걱정, 잘 안 자서 걱정, 자주 아파서 걱정...
그때 걱정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지금 돌아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지금 걱정하는 이것들도 2년 뒤면 그래서 아들이 중학생이 될 무렵이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일들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그 일들을 매번 지나가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고 만다.
누군가 인생은 기다림이 반이라고 했던가.
육아도 동일한지도 모르겠다.
해결해 줄 수 없는 일들이 태반,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일, 그것만 잘해도 훌륭한 엄마인 것 같은데, 그게 매번 이렇게 힘들다.
그리고 지켜보는 게 힘든 그 마음 이면에는 아들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숨어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정말 잘 해낼까? 도와주지 않아도 잘 해낼 수 있을까? 혹시 잘 못하면 어쩌지? 내가 뭐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날마다 찾아오는 그 생각들이 괴로워서, 나는 무엇이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아들에게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눈엔 아슬아슬해 보이던 아들은 도리어 굳은 믿음이 있었다.
내가 지금은 좀 불편하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잘할 수 있을 거야.
중학생 되면 프랑스어도 더 잘할 거고,
프랑스 친구들이랑도 신나게 어울릴 거야.
난 이미 프랑스 친구들 많이 사귀었는걸.
그러니까 뭐 걱정 안 해도 잘 될 거야.
아들은 그렇게 자기 자신이 잘 해낼 거라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엄마가 흔들리던 그 순간에도, 아들은 스스로 자신의 편이 되었다.
그 사실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이제 그만 모든 불신을 거둬들여야겠다.
뭐라고 잔소리를 하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아들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내 안심을 찾고자 하는 모든 시도도 그쳐야겠다.
대신 더 믿어줄 수 있기를.
아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지금 잘하고 있어,
잘 될 거야,
지금까지도 잘 해왔잖아.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이렇게
아들에게서 믿어주는 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