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학교들 중에서 몹시 고심을 했다.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학교와, 면학 분위기가 더 좋은 학교 중에서 골라야 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었다.
부모님께 여쭤볼 수야 있었겠지만, 그럼 또 “뭐?”하며 토끼같이 눈을 크게 뜨고 뭐 그런 걸 나에게 묻냐는 듯이 쳐다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없는 형편 속에서 자란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언제나 스스로 잘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모님은 계셨지만, 내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
숙제를 하라고 말씀하실 수는 있지만, 곁에 앉혀 놓고 숙제를 봐주지는 않으셨다. 그럴 여력이 혹은 능력이 되질 않으셨다.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주는 정도, 그것이 내가 엄마아빠에게 기대할 수 있는 호의였다. 물론 그것으로도 감사했다. 그것조차도 못 누리는 아이들이 주변에 태반이었으니까.
나는 가진 축이었고, 그 동네에서만큼은 비교우위였다. 그 사실이 그나마 내가 불평을 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런 이유로 감사했던 마음은, 언제라도 내가 비교우위가 아닌 때에 원망으로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땐 잘 알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마저도 못 누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감사한 마음으로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고등학교를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엄마아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는 벌써 어언...
몇 번이고 바뀌고 또 바뀌었을 교육제도와 내신, 수시, 수능과 같은 이야기들은 엄마아빠에게 너무나 생소했을 터였다.
“집 가까운 게 최고다 학교는”
별 고민 없이 툭 던지는 아빠의 말도,
“oo여고가 명문이었지. 거기 교복도 참 예뻤는데” 라며 추억에 잠기는 엄마의 말도,
이상하게 의지가 되질 않았다.
멀뚱이 서 있는 내게 결국 엄마 아빠는
"어디를 가나 다 너 하기에 달렸다. 노력하면 된다. 그러니 네가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라”는 논지의 말로 마무리했다.
나는 그 말이, “우리는 잘 모른단다”라는 말로 들렸다. 그리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졌고, 답답한 가슴 한편에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괜한 걸 물어가지고....
그러니 사실상 상의를 한다기보다는, 내가 고심하고 선택하고 부모님께 차근차근 설명을 해 드려야 하는 게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일찍 독립적인 삶을 살아야 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건 몹시 외로운 일이었다.
인생에 대한 크고 작은 모든 선택을 내가 해야 했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선택을 위한 정보도 내 힘으로 다 찾아야 했다. 이건 고작 10대 언저리의 나이에는 너무나 무겁고,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나는 내신을 잘 받을 수 있는 학교로 선택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남녀공학 고등학교가 새로 생겼다. 걸어서 다닐 정도의 거리였으니, 다니기에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같은 학교 친구들이 가장 많이 가는 학교였다. 그러니까 나만큼 가진 것이 없는 친구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학교로 간다면야 나는 지금의 포지션, 우등생 모드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고, 수시에 상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 학교를 1 지망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웬걸, 우리 학교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학교로 배정받았는데, 나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 것인지 버스를 타고 15분은 족히 가야 하는 중심부에 위치한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100년도 더 전에 선교사가 세웠던 여고로, 꽤나 명문고였다는데, 근래에는 그 명성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했다. 우리 학교에서 그 학교로 진학한 아이들은 고작 20명 남짓.
그럼 다른 아이들은 다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그럼 나의 포지션은?
아직까지는 그런 비극까지 내다볼 만큼 성숙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저 친한 친구들과 헤어졌다는 사실만이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만큼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