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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Aug 21. 2024

오해영 vs 오해영

같은 이름, 너무나 다른 인생

또 오해영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같은 반에 이름이 똑같은 두 오해영이 있는데, 한 명은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다. 다른 오해영은 평범하기 짝이 없어 맨날 예쁜 오해영에게 가려지는 처지다. 그 이후 많은 스토리가 펼쳐지지만, 다 떠나서 이 상황에 나는 너무나 공감하며 재밌게 봤었다.


고3 우리 반에 나와 이름이 똑같은(성은 달랐다) 한 명의 친구가 더 있었다.


그간 안간힘을 써가며 다시 성적을 많이 올렸기에, 그 친구와 나는 반에서 1등을 놓고 경쟁을 하는 사이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관점이다.


내 편에서는 그 친구를 이기고 1등을 할 때면, 아주 통쾌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눈치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더 싫었다.


그랬다. 그 친구는 우리 동네가 아닌 다른 동네, 형용사를 많이 붙일 수 있는 동네에서 온 친구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더욱더 그 친구를 이기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동네의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랬다.

우리 동네에 소 온 아이들은 공부에 큰 뜻이 없는 친구들이 많았고, 야자시간이나 수업시간에 떠들다고 혼나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네가 가진 게 뭐가 있냐, 공부마저 안 하면, 너 그 동네에서 너네 부모처럼 산다”


그 말을 들으면 분노가 치솟았다.


꼭 보여주고 말리라. 우리 동네 출신이라도, 그런 좋은 부모 없어도,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꼭 기필코 보여주고 말리라. 이를 갈았다. 나를 향한 비난이 아닌데도, 내 일부가 비난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슬퍼지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그 친구가 미웠다.

그 친구는 반장, 나는 부반장.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나와 그 친구는 동시에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내가 아닌 그 친구를 부르는 일이 더 잦았다.그럴 때면 왠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그런 덕에 친구들에게도, 선생님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내 내면에서 펼쳐진 이런 미묘한 구도만 아니었다면, 나도 아마 그 친구를 무척 많이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점점 더 경쟁심에 빠져들었다. 남은 건 공부뿐. 그 친구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쉬는 시간에도 문제를 풀었고, 점심시간에도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쉬는 시간에는 매점에 가고 점심시간에는 햇볕을 쬐며 수다를 떨곤 했다. 게다가 학교 축재 때면 무대에 올라가 힙합을 춰서 모든 친구들에게 환호를 받곤 했다.


시험 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1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누가 모른다고 물어보기라도 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이고 복습을 할 때,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느라 아침 자습시간을 다 쓰곤 했다.


나는 점점 더 그 친구가 미웠다.

내가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내가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그 아이를 따라잡으려고 애를 쓰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그 아이는 사랑하고 있었고, 사랑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저만치 멀리에 가 있는 느낌이었다. 전혀 힘든 기색도 없이.

나는 죽을 것 같이 힘든데 말이다.  



교무실에 갔다가 선생님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고, 그 아이의 부모님이 교사라는 걸 알았을 때,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내 굳건한 믿음을 확인했다.

역시... 부모를 잘 만나서, 그래서 그런 거였어....



둘 다 교대를 꿈꿨지만, 둘 다 수능을 망쳤다.


수능을 친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잘 봤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그 아이는 망했어요 하며 히히 웃었고, 나는 세상을 다 잃은 듯이 서럽게 울었다. 


그 아이에게는 녀석, 잘 좀 보지. 속상했겠네 하고 넘어가셨지만, 내 앞에선 너무나 당혹스러운 듯 서 계셨다.


나는 그때 알았다.


그 아이에게는 ‘다음’이 있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다음이라는 기회를 어렵지 않게 선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부모의 그늘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겐, 내 눈에 비친 우리 부모님에겐, 한 번 더를 선사할 여유가 보이지 않았다. 이번이 아니면 끝인 것 같고,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 절박함은 늘 내게 평안함을 주지 못했다.



그게 ‘마음의 여유’라는 걸,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가질 수 없었던, 아무리 애를 써도 따라잡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것.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저쪽 동네 아이들이 그토록이나 반들반들 윤이 나게 만드는 비상한 힘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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