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여행자로 살고 싶다
어제는 시험을 봤다. 생각보다 문제가 어렵게 나와서 그리 잘 보지는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지하철이 에펠탑 근처에서 멈춰 섰다. 모두 내리라 한다. 이 역은,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이 가장 피하는 역이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걸을 때조차도 줄을 서서 걸어야 하니.
날씨는 우중충, 빗방울이 돋고,
나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다.
게다가 집에서 세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걸어야 하다니, 오늘 뭔가 단단히 별로다.
이게 지하철을 내릴 때 내 생각이었다.
그런 나를 애써 달래며,
그래 오늘은 파리 여행하는 날이다, 마음먹고 지하철 역을 나서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묘하게 설레고, 묘하게 들떴다.
마치 설렘의 근원지로 다가가기라도 한 것처럼.
어째서 그럴 수 있었을까.
사실은 그랬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우비를 입고 서서 사진을 찍으면서도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펠탑 근처는 온통 공사 중인데,
그 공사 중인 에펠 앞에서,
비가 흩날리는 중에도 세상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누리기라도 하는 냥 행복한 표정으로,
설레는 몸짓으로 기쁨을 뿜어내고 있는
그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문득 궁금했다.
저들은 왜 저렇게 행복할까?
매일 에펠탑 앞을 지나다니는 나는 더 아름다운 날과 덜 아름다운 날을 구분할 수 있었다.
맑고 쾌청한 하늘 아래 우뚝 쏟아있는 에펠은 정말이지 아름다웠고, 노을이 어스름 질 때 에펠은 어쩐지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것 같았다. 안개가 자욱이 에펠을 가리고 있을 땐 신비롭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날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흐리고 해가 없는 날씨가 태반인 겨울의 에펠은 빗줄기가 부슬부슬 흩날리는 날의 에펠은 그다지 내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불행하게도 그런 날,
하필이면 일생일대의 여행을 온 것이다.
내 편에서 보면
그들의 상황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이들이 보는 에펠은 손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건 하등 상관이 없다는 듯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때 문득 깨달아졌다.
그들에게 이 순간은 찰나와 같기 때문에,
오늘이 지나면 그들은 이 순간을 잃어버린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이런저런 이유들로 이 순간을 방해받을 수가 없다는 것을.
공사 중인 에펠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흩뿌리는 빗방울도, 흐린 날씨도 그들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장 꿈꾸던 순간을 지금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고 있다는 사실뿐.
그렇기에 그들은 이렇게나 온몸으로
순전한 행복감을 뿜어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많은 예술가들이 인생이 여행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생도 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다.
다만 그 느낌을 간절하게 느끼며 살지 못할 뿐.
그러고 보니 아들이 어느새 중학생이 되었다.
내 품에 폭 안겨오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이걸 어쩌나 벌써 입학이네 하던 초등생도 지나 어느새 중학생. 딸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붙었다고 춤을 추던 시간을 지나 힘든 이 공부, 한숨이 포옥 쉬어지지만 생각해 보면 이 시간도 길지만 찰나 같은 인생 가운데 정말 정말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찰나들을 놓치며 살고 있나.
왜 나는 어느 순간이면 또 다 변해버리고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 소중한 것들을 온몸으로 행복하게 누리지 못하고 어제는 시험이라 찌푸림, 오늘은 공사를 해서 불만, 내일은 비가 와서 불평, 이렇게나 어렵고 불편한 것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가.
찰나 같은 순간들, 지나가버릴 인생 앞에
오늘도 나는 내 인생으로 여행을 떠나야겠다.
내일이면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이기에,
공사를 좀 해도, 비가 좀 흩날려도, 내가 바라던 만큼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 순간들이라 할지라도
그저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행복하고 싶다.
그리고 이 하루를 기억하리라.
가장 아름다웠던 날이라고.
그렇게 매일매일이 가장 아름다웠던 날이라고 기억되는 여행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