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온 뒤로 줄곧 한국어를 가르쳤다.
심리학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기관에 속해 그룹 수업을 진행했지만,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는 시간이 나지 않아 개별 과외로만 수업을 이어갔다.
한국어 수업은 내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에 와서 늘 쪼그라들어 있던 시점, 서툰 불어로 프랑스인들 앞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엔 수업이 끝날 때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게 배우려 모인 프랑스인 학생들을 보면 어쩐지 잔잔한 위로를 받곤 했기 때문이었다.
초보 강사였던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더 어깨를 펴고 일상을 살아가게 했다.
또 다른 의미로, 한국어 수업은 한 달을 견디게 하는 작지만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었다. 고물가로 유명한 파리에서 맞벌이를 포기하고 공부를 시작하는 일은 아슬아슬함을 견디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슬함 가운데 작게나마 벌어들이는 행위는 내게 안정감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을 조금씩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 한 학생에게 마음이 자꾸 상하기 시작했다.
몇 년 전 그룹 수업에서 만났던 학생이었다. 몇 년이 흐른 뒤, 다시 과외를 받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벌써 오래전 일이어서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아, 나를 스쳐간 학생 중에 나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구나.”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그 학생은 이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초급 반에서 만났었는데 어느새 한국어가 많이 유창해져 있었다. 우리 수업은 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적절한 주제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이어가다, 그 친구가 틀리는 표현이나 모르는 표현만 바로 잡아주면 됐다.
대화를 나누고 교감을 해 나가는 일은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고, 그 친구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쌓일수록, 나도 그녀를 점점 더 애정하게 되었다.
게다가, 나를 잊지 않고 다시 찾아준 제자가 아닌가? 어쩐지 더 의미 있는 관계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학생은 점점 바빠졌다.
수업에 부쩍 소홀해지고, 미리 말하지 않고 시간을 어기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일에 갑자기 오늘은 어렵다고 통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곤 했다.
남편은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만두는 게 어때?”라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며칠 전에도 수업이 어렵다고 연락이 왔고, 나는 상황을 정리하며 답했다. 다음 주는 내가 사정이 있어 어렵고, 원하면 다른 요일이나 다다음 주에 수업을 하자고.
그런데 학생은 답이 없이 사라졌다.
마음이 점점 더 불편해졌다.
그저 일일 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상하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반짝반짝 빨간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사실 과외를 하다 보면 이런 일들을 자주 마주한다.
생각보다 젠틀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참 많구나
상식적인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사람도 꽤 많구나.
모두 이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다.
물론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일은 분명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이 상할 일인가 하면, 그것도 분명 아니었다.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반복되면, 남편 말처럼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걸 원하지 않는 내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놓을 수 없는 나, 놓을 수 없다고 믿는 나.
결국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가만히 돌아본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과외를 그만두기 전에 나타나는 전조일지도 몰라…
유쾌하게 해 오던 수업이었는데,
그렇게 힘들지도 않은 수업이었는데…
내가 요즘 수업을 잘 못했나?
기대치에 못 미쳤나?
그래도 그렇지… 예의는 갖춰야지…
이게 뭐야… 한두 번도 아니고...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야…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은, 결국 이 과외가 계속 유지되길, 적은 수입이라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복닥이던 그 며칠간,
정작 이 학생에게 무엇이 더 유익할까 하는 고민은 1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학생을 떠올려본다.
수업 시간마다 활짝 웃으며 “선생님…” 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내 속에서 올라오던 판단과 불만이 조금씩 사그라진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던 건 아니야.
정말 바빠 보이긴 해.
바쁘면 그럴 수 있지. 아직 어리기도 하고….
그만두고 싶은데 미안해서 그러는 걸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자, 날이 서던 마음이 한풀 꺾이고,
도리어 그녀를 살피는 마음으로 돌아선다.
그러자 솔직한 속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런데 수입이 줄어들 텐데… 괜찮을까?’
결국 그 걱정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내 수입에 대한 걱정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나는 나의 불안을 피하고자
그녀를 붙들고 싶었던 것이었다.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며칠 후, 학생이 다음 주와 다다음주 수업도 어렵다고 답을 보내왔다. 나는 불편한 마음 대신, 놓아주는 마음으로 답장을 썼다.
“혹시 너무 바쁘다면, 수업을 계속하기 어렵다면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그러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듯 재빨리 답장을 보내왔다.
“선생님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수업을 계속하고 싶어요. 지금 조금 바쁠 뿐이에요.”
그제야 나는 그녀의 진심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례하게 보였던 행동 뒤에 숨은 마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결코 나를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진심을.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불쾌함의 시작점은 결국 내 안의 기대와 욕심이었다는 것을.
나를 위해 그녀가
거기에 계속 있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생각했던 대로 그녀가
계속해서 나를 원하는 학생이길 바라는 욕심
그렇게 나의 필요가
계획대로 채워지길 원하는 갈망
영원히 나를 향해서만 유효한 그 생각들 때문에
나는 그녀를 더 크게, 더 강하게
왜곡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시간표와 삶이 있을 뿐.
지금은 단지 한국어가 다른 일보다 조금 덜 중요한 시간을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헤아리며, 나의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결국, 내 가장 큰 적은 집착하는 마음이었다.
무언가를 흔드는 사람 앞에 내 마음이 크게 흔들릴 때, 멈춰서 돌아보아야 한다.
문제는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에 강하게 반발하는 내 마음임을,
내려놓지 못한 내 욕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바라볼 때,
비로소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