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많은 인생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by 마리앤느

“엄마 나에게 요술지팡이가 있다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다시 데려올 텐데..”



올해로 아홉 살 된 아들이 어느 밤 내게 툭하고 던진 이야기였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데려오고 싶다하는 아들 말에, 나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씩씩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때로 어린 아들 눈에도 내가 안쓰럽고 애처로워 보였던 것이었을까.





국화꽃처럼 얼굴이 하얗고 곱던 엄마가 돌아가신 날은, 낙엽이 아름답게 물든 어느 가을날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학교 교정에서, 갑자기 쏟아진 세찬 빗줄기에 당할 길 없이 단풍잎을 모두 떨구고 처량하게 서 있던 나무들을 마주한 나는, 와락 눈물을 쏟았다.


세상에는 이토록이나 갑작스럽고 그래서 더 슬프고 아픈 이별들이 왜 이렇게도 많은가. 세상 화려하던 나무가 잎사귀를 떨구고 한없이 처량한 그 모양이, 꼭 엄마를 보내고 세상 불쌍한 아이가 된 나 같아서, 교정을 거닐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그때가 바로 스무 살 떄였다.




내 인생의 첫 상실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첫 상실이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로 인한 아픔은 실로 컸다. 너무나 당연하게 먹고 자고 공부하고 사람을 만나고 웃으며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멈춰버렸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엄마가 사라지고 난 뒤, 내 마음에는 기나긴 우기가 찾아왔다.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고 또 내렸다. 그러나 행여라도 젖을까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던 엄마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진심으로 웃으며 즐겁게 살아갈 수도 없었다.



다만 견디고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엄마,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듯 돌아가는 세상 한가운데에 서서, 여전히 살아내야 할 내 몫의 인생을 다만 살아내고 있었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조금 더 나아질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밤이면, 안방에서도 잠들지 못한 아빠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아빠 마음에도 기나긴 우기가 찾아온 것이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짐이 될까 각자의 방에 갇혀 기나긴 우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렇게 이 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좀 나아지려나 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인생의 두 번째 상실을 맞이했다. 아빠였다. 또 한 번, 예고 없이 찾아온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나는 한 없이 무너져 내렸다. 애를 쓰고 견디며 나아질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나왔던 지난 이 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아빠는 그렇게 훌쩍 내 곁을 떠나갔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세상 위에 홀로 서 있는 듯 외로웠다. 밤마다 울며 생각했다.

이 모든 일들이 왜 하필 나에게 일어났을까.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됐던 것이었을까. 인생이 이토록이나 슬픈 것이라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끝도 없는 그 질문들 앞에 나는 홀로 서야 했다.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었고,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었다. 그렇게나 슬픈 나날이었다.




그렇게 외롭게 그 시간을 견뎌가던 중 내 슬픔을 끌어안는 남편을 만났고,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하는 힘이 센 세월이, 그렇게 나를 슬픔 속에서 건져내 오늘에 데려다 놓았다. 어느새 상실과 눈물은 오래전 옛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 슬픔까지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때때로 가슴 먹먹한 순간들이 왜 없겠는가. 결혼을 하던 날도, 아이가 태어나던 날도, 그리고 매년 돌아오는 생일날도...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과 가장 쓸쓸한 날들마다 나는 엄마의 빈자리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눈물 몇 방울을 흘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런 순간들마다 내게 손을 내밀어 엄마의 자리를 매워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네 부모 맞재빈데...” 사랑해 마지않던 장남과 큰며느리를 잃고 세상 허망한 표정을 짓곤 하시던 할머니는 어느 날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내 엄마가 되어주셨다. 인생의 노년에 업둥이처럼 찾아온 나를 애지중지 귀하게 길러주셨다. 결혼식 전날 밤, “여기가 니 친정이다. 잊지 말거라.” 친정 없다는 생각에 혹여 내 마음이 무너질까 애가 타, 눈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머리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시던 그 손길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아가씨, 야는 아가씨 딸이야.” 유언 같은 엄마의 말을 마음으로 받으시고는 가슴으로 나를 낳아주셨던 고모는 첫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까지도 손수 몸조리를 해 주시며 내 곁을 늘 지켜주셨다. “엄마” 하고 전화를 걸면 언제나 “우리 딸”하고 받으시는 고모였다. 받은 사랑이 커서 늘 미안해하는 내게 사이좋은 모녀처럼 함께 늙어가자며, 나이 들어 등 밀어줄 딸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소녀같이 웃으시는 고모를 볼 때면 내가 받은 복을 헤어 보게 된다.


뒤늦은 신앙생활에 만나게 된 목사님도 그랬다. 내 모든 사연을 아시고는 동정이 아닌 사랑으로, 그리고 형식이 아닌 진심으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를 자녀로 맞아주셨다. 언제고 엄마가 그리운 순간이면 곁을 내어주시는 목사님의 까닭을 알 길 없는 그 사랑은, 내게로 소리 없이 뚜벅뚜벅 걸어와 꽁꽁 얼어있던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담요가 되었다.


그랬다. 내가 가장 아픈 때에 나를 향해 내밀어 준 사람들의 손길은 셀 수도 없이 많았고 그리고 참으로 아름답고도 따뜻한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눈물의 시간들을 이겨내었다.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면 언제고 다시 꽁꽁 얼어버리는 마음이, 그러나 여전히 그런 나를 품어 안는 사람들의 작은 손길 앞에 녹아내렸다. 어느 동화 속 세찬 바람이 따스한 태양을 이길 수 없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슬픔의 알을 깨고 나온 나는, 나와 같은 슬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느 해, 아빠를 떠나보낸 친구를 찾아갔을 때도, 또 어느 때에 엄마를 떠나보낸 친구를 찾아갔을 때도 나는 그 어떤 섣부른 말로 그 친구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또 쉽게 마음 저편에서 동정하거나 연민하지도 않았다. 다만 꼭 안아주었다. 내가 그들에게 증거가 되길... 그 모든 아픔들을 겪고도 삶이 무너지지 않고 도리어 더 풍성해질 수 있다는 작은 증거가 되길... 저이가 견뎌냈으니, 나도 이 아픔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으리라는 작은 위로가 되길... 내 몫의 가시밭길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가서 위로의 씨앗이 되기를.. 작디작은 이 가슴으로 기도하며 다만 그 친구를 꼭 안아주었다.



이제 내 차례다.


내 눈물의 시간을 함께 견뎌준 무수히 많은 손길을 기억하며 내가 그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세월이 나를 데려다 놓은 오늘에 서서, 누군가의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헤아려 주며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써 내려간다.

나의 그 아팠던 시간들이, 그걸 견뎌보려 무던히 애를 쓰며 살아왔던 그 세월들이 누군가에게 다가가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고 말해줄 수 있기를. 홀로 숨죽여 눈물 흘리고 있는 그이에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 글들이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비록 홀로 견뎌야 할 아픔의 터널 한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우주가 그를 에워싸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기를....



그것이야 말로,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그 무수한 천사들의 손길 앞에 보답하는 일이기에 덮어두었던 그 아픔의 기억들 사이를 헤매며 몇 자를 적어본다. 눈물과 아픔 위에 사랑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러고 보니 내게 누군가가 그러했듯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러하길 원하듯, 이렇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사랑이야 말로 슬픔 많은 이 인생의 숨겨진 묘미라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눈물로 얼룩진 인생까지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나는 비로소 고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