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 카톡을 확인하니 평소엔 연락을 자주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서도 축하한다는 문자가 여럿 와 있었다. 시부모님이 이미 며칠 전에 생일을 축하한다며 보내주신 용돈에, 고모의 사랑 가득 담긴 전화까지.
그러나 진짜 가슴 찐한 감동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남편은 아침 일찍부터 보글보글 미역국을 끓여냈다. 아이들은 눈을 뜨자부터 엄마 생일 축하해를 연발하며 달려와 안겼다. 그 전날 엄마에게 주겠노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적어낸 편지를 아침 내 꺼냈다 넣었다 읽었다 접었다 하고 있다. 온 집에 구수하게 퍼지는 미역국 냄새, 알록달록 아이들의 편지, 웃음소리, 나의 탄생을 나보다 더 기뻐하고 설레 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뭉클한 아침이었다.
그렇다. 생일은 행복한 날이다.
1년 중 364일은 그렇지 않았다 할 지라도, 적어도 이 날 하루만큼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날.
'사느라 바빠서 잊고 있었는데,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나를 축복하는구나, 내가 이토록 환영받고 있구나' 하고 느낄 자유를 온전히 획득하는 날. 그런 날이 어쩌면 생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생일이 나에겐 어쩐지 슬픈 날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는 내가 홀로 남아서, 이런 날 나를 낳아준 내 뿌리로부터 축복받지 못해서 슬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기르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나의 슬픔은 그것보다도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세월이 조금 더 흐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모든 슬픔은 한 사람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너만 아니었으면 네 엄마가 저렇게 살지는 않았을 게다."
내가 이제 막 유치원을 다닐 무렵, 외할머니께서 혼잣말처럼 툭하고 던진 저 한 마디 말이 내 가슴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너 때문이야!"하고 삿대질을 하며 달려드신 것은 아니었다. 어떤 원망이나 살기 같은 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 순간 깊이 느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꽃처럼 곱던 딸이, 시집을 가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이혼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외할머니는 부끄럽게 왜 그러냐고 돌려보내셨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때 내가 너에게 이혼을 하라고 했더라면 너는 다르게 살았을까....
그리고 직후에 엄마는 내가 생겼다는 걸 알았다. 엄마의 이혼에 대한 열망은 나의 등장과 함께 영영히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고 돌이 지날 무렵, 엄마의 온몸에는 붉은 점이 돋아났다. 경대 병원에서 갖은 검사를 다 했을 때 루프스라는 병명을 얻었다. 믿을 수 없었던 가족들이 엄마를 데리고 서울대 병원까지 가 보았지만 병명은 바뀔 줄을 몰랐다. 그렇게 엄마는 나을 수 없는 병을 이고 살아가는 불치병 환자가 되었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다정스러운 사람이었고, 시를 좋아했고, 사람을 좋아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사회에서 더 환영받는지, 직장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지, 돈을 잘 벌 수 있는지와 같은 것에는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서운 할아버지 밑에서 장남으로 자라며 껶이고 또 꺾이는 날들의 반복이었던 아빠는 누가 꺾으려 들지 않아도 쉬이 꺾어지는 사람이었다. 그 꺾어짐의 고통을 이기려 아빠는 술을 드셨다. 술잔 속에 술을 담고 눈물과 함께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나 아빠가 그럴수록 엄마의 삶은 더 무거운 것이었다. 아빠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도리어 불쌍한 사람이어서 엄마는 더 많이 애태웠고, 더 많이 힘들었다. 엄마에게 주어진 평생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버릴 수도 떠날 수도 그렇다고 기댈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그런 딸의 평생을 바라보면서 외할머니는 늘 사위가 탐탁지 않았다. 좋은 집안에 잘 보낸다고 보낸 결혼 생활의 귀결이 딸의 불치병이었다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럴 줄을 모르고 그 결혼을 환영해 마다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향해서, 그리고 조금 더 잘해주길 원했지만 결코 조금 더 잘해줄 능력이 없었던 무능한 사위를 향해서 원망은 늘 들끓었을 것이다.
"너만 태어나지 았았어도 네 엄마가 저렇게 살지는 않았을 게다."
그렇게 꽉꽉 눌러두었던 모든 슬픔과 원망이 불현듯 어리고 약한 손녀에게로 툭하고 향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말은 내 마음에 들어와 깊이 박혔다.
어린 시절 내내, 나는 엄마가 아프면 마치 그것이 나 때문인 것 같아 숨죽여 울었다. 내가 태어나서 엄마가 더 힘든 건 아닐까, 그게 미안해서 엄마가 불쌍해서, 그걸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타는 것처럼 아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의 행복과 나의 존재가 상충되는 것이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 것이다. 나는 생일이 유난히 기쁘지 않았다.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엄마 아빠까지 돌아가시고 나니, 생일은 더더욱이나 기쁘지 않은 날이 되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른 채로, 그런 감정을 안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첫째 애를 임신했던 무렵이었다.
교회에서 한 집사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모두가 함께 초를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집사님이 수줍게 초를 불고 나자 목사님께서 돌아가며 한 마디씩 축복의 말을 해 주자고 하셨다. 몇 번 대화도 나눠보지 않은 남자 집사님께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갸웃거리다 벌써 내 차례가 되었다.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툭하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내 입술로부터 나와 내 귓가를 울리며 내 가슴으로 내려가는 동안 내 마음이 함께 울렁울렁거렸다. 무언가 뜨거운 게 가슴으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집사님은 수줍어 하면서도 방긋 웃었다.
그 분과 나는 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게 내 진심일까? 하고 내가 나에게 되묻는다. 그냥 한 말이었다기엔 너무나 강렬한 감정이 그 말과 함께 일렁였다. 그랬다. 외할머니의 무심코 던진 그 한 마디가 내 가슴에 남아 상처를 내는 동안, 사실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한마디 그 말이 그렇게 내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구나, 내가 받았던 그 상처를 거슬러 진심으로 누군가를 축복하고 싶은 그 마음이 그렇게 내 입술을 통해 흘러나왔구나 깨달았다.
그랬다.
"네가 태어나서 참 기쁘다."
"네가 내 딸이어서 참 행복하다."
"네가 태워나 줘서 정말 고맙구나."
나는 그 말이 그토록이나 듣고 싶었다. 엄마에게서. 그러나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엄마, 내가 없었다면 엄마가 조금 더 행복했을까?"
외할머니가 내게 남긴 상처를 엄마 가슴에 다시 남겨줄 수가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정말 그것이 사실일까 봐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덮어두고 묻어둔 채로 지나왔던 그 시간들, 그러나 이제 영영 엄마에게 물을 수도 없게 되었다. 다만 엄마가 내게 보여주었던 사랑의 흔적들을 더듬고 또 더듬으며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는 증거들을 붙잡고 살아갈 뿐.
돌이 막 지나고 불치병 판정을 받았을 때, 그리고 언제 돌아가시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견을 들었을 때, 엄마의 소원은 내가 대학 가는 걸 보는 것이었다고 했다. 왜 하필 대학이었을까, 그래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곁에 있어주고 싶었던 엄마의 진심이었으리라.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가 할머니께 알려드리려고 전화를 했을 때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야야, 이제 네가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정말로 대학 갈 때까지 살았구나. 장하다 장해."
"어무이, 그게 무슨 말씀이라예.
시집가는 거는 봐야지예."
그러고 보니, 언제든 미련 없이 천국으로 갈 수 있었을 엄마가, 그 정도로 늘 아팠던 엄마가, 20년을 더 산 것은 나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픈 몸을 이끌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낸 엄마, 끝까지 내 곁에 있어주려 했던 엄마, 그 엄마를 반추하며 내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아픔 한 조각을 거둬내 본다.
떠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었던 엄마의 막막한 인생 한 가운데에서 그래도 내가 엄마로 하여금 엄마의 힘겨운 삶을 견디게 만드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자라는 나를 보며 하루를, 또 하루를 견뎠을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고 한 줌 재와 같이 사라지고 말 인생 가운데 그래도 엄마를 기억해 줄 사람, 그래도 엄마를 여전히 사랑해 줄 한 사람을 남겼으니, 짧았던 엄마의 인생은 그런 이유로 조금이나마 더 아름다운 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애써 나에게 말해준다. 내 인생 가운데 내 아이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아이들이 써 준 편지를 가만히 꺼내 읽는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맙습니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요.
아이들의 삐뚤빼뚤한 편지 위로 흩뿌려진
사랑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태어나길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우리 아내"
라는 남편의 편지 구절 앞에 한참 동안 눈길이 머문다.
"딸아, 태어나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나도 참 많이 행복했다"
나를 향한 따스한 말들을 힘입어 상처를 애써 떨쳐내며 가물가물한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태어나길 잘했다.
태어나길 잘했다.
그 아픔을 딛고
이만큼 살아오길 참 잘했다.
참 따뜻한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