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엔진, 끝없는 착취

<설국열차>

by 이지원




설국열차, 2013





영화 <괴물>, 2006 / 영화 <미키17>, 2025


요즘 미디어 콘텐츠는 조회수를 위해 자극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극적인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장면들은 도중에 시청을 중단하게 될 정도로 피로하게 다가온다. 생각없이 영화를 즐기고 싶은 날에는 힐링을 기대하며 재생버튼을 눌렀다가 뒷걸음치며 디즈니를 찾기 일쑤이다. 하지만 데스티네이션처럼 비현실적인 공상영화가 아닌 이상, 이런 자극적인 줄거리는 결국은 현실의 일부를 극단적으로 확대 재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하다는 말처럼 세상 곳곳에서는 “이런 일이 실제로 있다고?" 싶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매일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통해 목격한다.


반면에 <미키17>, <괴물>, <설국열차> 등의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들은 오히려 이와 대조적이다. 봉준호 감독님의 작품들은 어쩌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상적이고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스토리라인의 탄탄함을 유지하는 동시에 대부분의 감독들이 흥미를 위해 사용하는 폭력·학살·성적 자극 장면들을 과감히 배제한다. 인질이 함부로 죽지 않고, 고문이나 자극적인 대사가 등장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여전히 흡입력 있게 전개된다. 이런 연출이 자극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유치할 만큼 순수하게 느껴지지만, 그렇기에 감독님의 영화는 오히려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최근에 본 몇몇 영화는 그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작품이었다. 모든 영화에는 저마다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콕 찝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예시를 든다면, 최근에 접한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아포칼립토'는 여러 번 시청을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폭력적인 장면들을 가감없이 묘사해서 조금 힘들었었다. 너무나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하려는 사실성, 즉, 부정하고 싶은 현실의 본모습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외면하고 싶을 진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괴로움이야말로 영화가 시청자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설국열차에서 열차의 맨 뒤칸에서 앞칸으로 나아가는 여정은 단순한 오락이나 생존 게임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투쟁과 계급의 은유로 작동한다. 그 여정 속에서 감독님은 (몇몇 장면들은 영화의 특성상 어쩔 수 없지만) 행위 자체를 쾌감으로 소비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며 칼을 휘두르고 피가 튀는 장면보다 더 무서운 건, 질서와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인간의 착취 구조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조용히 각인시킨다.


각인되는 폭력의 이미지보다도 질문을 택하는 감독님의 영화는 오히려 폭력의 진짜 본질에 더 가까이 닿는다. 관객 스스로 추악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이 절제야말로 봉준호 감독님의 영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움직이는 부품으로 대체되고 있는 아이들


<설국열차>에서 인류의 생존자들은 영원한 엔진이 움직이는 기차에서 살며 무한동력을 개발하고 관리하는 길버트를 숭배한다. 하지만 영화 후반에 연료가 고갈되거나 부품이 마모되고나면 아이들이 움직이는 부품으로 대체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상적인 세계, 즉 영원한 엔진은 허상이며 계급사회는 약자를 희생해 이상적인 체계를 유지함을 보여준다.


잠시 주제에서 벗어나서, 다소 뜬금없지만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공학적인 요소는 무한동력이었다. 무한동력의 역사는 어떻게 될까? 실제로 인류는 오래전부터 외부의 에너지가 없이 영원히 작동하는 무한동력을 꿈꾸어왔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2세기에는 인도의 수학자 바사카라가 수은을 담은 바퀴를 제안하며, 수은이 회전하면서 한쪽으로 쏠려 균형을 깨뜨리면 바퀴가 계속해서 돌면서 에너지를 생성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은이 고르게 분포하며 불균형이 상쇄되어 바퀴는 결국 멈췄다. 또 찰스 레드헤퍼는 1812년 중력과 기어를 이용한 영구기관을 선보였지만, 조사단을 통해 외부동력이 공급되고 있었음이 밝혀져 사기로 판명되었다. 중세헤는 물레방아와 자석장치, 이후에도 마그넷과 전기기판, 진공 장치 등 영구기관을 향한 끊임없는 시도와 특허가 신청됐지만 모두 에너지를 소모하거나 외부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설국열차> 세계관 속의 무한동력은 이론적으로 두 열원간의 온도차이에 따라 발생한다. 두 열원 간의 온도 차이에 따라 열기관의 효율이 결정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엔진은 눈과 얼음의 온도차로 운행된다. 하지만 효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기차는 결국 외부 연료나 열원이 필요하다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결국은 ‘눈’과 ‘얼음‘이라는 날씨에 의존적인 외부자원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동력이라고 보기에도 어렵다.



영구기관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구현이 불가능하다. 무한동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형태만 바뀐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제1법칙)과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제2법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영구기관은 외부 에너지 없이 지속적으로 일을 하는 장치로, 들어간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보존 법칙을 위반한다. 또, 영구 기관은 단일 열원에서 열을 완전히 일로 전환하려는 장치이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에너지 변환 과정에서 열은 손실되거나 마찰 등 무질서한 형태로 분산되므로 엔트로피 증가 법칙에도 위배된다. 그리고, 만약에 진공과 마찰이 없는 이상적인 상태를 가정하더라도 부품간의 접촉과 소음 등으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할 수 밖에 없으므로 완전한 효율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여 결국 외부 연료나 열원이 필요하다. 현실에서 구현한 회전하는 부품은 결국 운동에너지가 감소하고, 에너지를 출력할 때마다 감속하게 되며 일정 속도로 회전하는 바퀴도 에너지를 꺼내쓰면 곧 멈추게 되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영구기관 기도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둘 중 하나의 법칙이라도 현실에서 성립한다면 물리학 체계의 판도가 뒤집힐 정도로 현재의 기술력으로 무한 동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한다.


결국 <설국열차>의 ‘영원한 엔진’은 과학적 불가능을 알고도 채택한 은유이자 유토피아는 약자의 희생으로 위태위태하게 실현된다는 디스토피아적인 폭로다. 폭력과 감각적 자극이 넘치는 시대에 감독님의 영화는 내게 두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우리는 끝없는 자극에 익숙해졌을까? 또, 사람들은 왜 계속해서 불가능한 영구기관을 꿈꿀까? 어쩌면 사람은 단순히 현실의 잔혹함뿐만 아니라 자극에 맞서는 상상 속에서 희망과 동심을 찾으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인 장면을 배제하고 인간의 욕망과 사회의 모순을 스스로 돌아보게하는 나이브함이 나에게는 감독님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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