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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치 Aug 28. 2024

냉면사건.

-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김수정

두 사람의 바이오리듬이 100% 맞을 순 없을 노릇. 가라앉는 내 기분이 남편의 하루까지 망치게 할 순 없고, 넘치는 텐션이 조용히 쉬고 싶은 남편의 피곤함에 불을 지필 순 없는 일이다. 그럴 때면 얼마간의 외로움을 느낀다. 결혼해도 인생은 혼자야, 따위의 촌스러운 문장을 인중 어딘가에 숨겨놓고 티 나지 않을 만큼만 입을 삐죽 댄다. 곧 지나갈 이 외로움을 조용히 삭인다.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김수정



한 사람과 10년째. 이제는 취향 다른 것쯤이야,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바이오리듬이 다른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다.


장거리 통근을 하느라 집에만 오면 녹초가 되어 쓰러지듯 잠드는 남편을 백번 이해한다. 나 또한 체력이 좋지 않고,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업무가 일상이다 보니 산더미처럼 쌓이다 못해 넘쳐흐르는 빨래바구니를 못 본척하는 것이 특기다. 그리곤 괜히 죄책감에 남편에게 "빨래 오늘 하지 말자. 내일 같이 하자."라고 말하며 은근슬쩍 빨래 미루기 범죄(?)의 공범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남아돌아 그냥 잠들기 아쉬운 날이다. 그날은 괜히 남편의 피로가 서운해 혼자 삐죽거리며 잠든 날도 있다.


남편은 위가, 나는 장이 약하다. 그래서 숨 쉬듯이 서로의 컨디션 조절을 위한 잔소리를 한다. 조금만 서늘해지면 바로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달려가야만 하는 나에게 남편은 "긴팔 챙겨 왔어?", "아이스 먹어도 되겠어?", "반바지, 괜찮겠어?"라고 묻는 것이 일상이다. 일정량을 조금만 초과하면 바로 며칠간 체해 고생하는 남편에게 나는 "배부르기 전에 멈춰.", "배 안 불러?", "솔직하게 말해봐. 진짜 (그것까지 먹어도) 되겠어?" 라며 간섭과 통제를 아끼지 않는다.


이번 여름휴가도 누구 하나 아파서 속상한 일이 없도록 아주 엄격하게 서로를 단속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맛있는 것들을 골고루 먹고,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마지막날 마지막 식사 후 급하게 차를 돌려 화장실에 달려갔던 한번 빼고.)


성공적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즐거움에 우리는 그만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바로 '냉면 사건'. 남편은 냉면과 거의 원수 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냉면을 먹고는 멀쩡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오늘은 여독 때문인지, 남들 출근하는 날에 둘 다 쉰다는 쾌감 때문인지, 브런치로 돼지갈비와 냉면을 콤보로 시켜 먹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먹어버렸다. 위+장 콤플렉스가 있는 우리 커플에게 이 식사조합은 재앙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아니 사실 마침 갈비가 당기는데 여행하는 며칠 컨디션 괜찮았으니까 오늘도 괜찮겠지, 하고 과거전적을 흐린 눈 해버린 내 잘못이다. 매번 안 좋았던 기억 때문에 스스로도 늘 거부하는 '그 음식'을 오늘은 후루룩후루룩 잘도 먹었던 그도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다른 바이오리듬은 여지없이 드러나버렸다. "오늘 갈비 진짜 맛있었다! 저녁에 또 먹는 건 미친 거겠지?"라는 농담을 한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남편의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저녁에 야간 등산을 도전하기로 해서 그 기대감까지 겹쳐 컨디션 최상이었던 나는 김이 푹- 빠져버렸다. 몇 시간 동안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고통스러워하던 남편은 오들오들 떨다가 간신히 잠에 들었다. 나는 등산동호회에 불참함을 알리고 남편의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렀다.



두 사람의 포물선이 어긋나고 또 어긋나다 어느 날 같은 지점에서 만나는 날이면 그날이 바로 파티 투나잇. 세상 모든 게 다 아름다워 보이고 역시 결혼하길 잘했고, 남편이 있어 내 삶은 더 풍요로워졌고 행복은 두 배가 되었다며 찰나의 기쁨을 만끽한다. 그러다 다시 포물선이 각자의 속도와 리듬대로 제갈 길을 가면 언제가 될지 모를 텐션 일치의 날을 기다린다. 조용히, 때로는 사무치게.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김수정



우리의 포물선이 같은 지점에서 만나는 그날을 조용히 기다려본다.


그리고 이제 식후 아이스크림, 냉면은 우리 부부의 앞으로의 역사에 없을 것이다. 절대!


[배가 멀멀해서(?) 싫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냉면 속 배를 혼자 다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천생연분이다!' 라며 들떠서 찍은 사진. 이제 보니 다소 씁쓸하다.]


안녕 냉면.

맛있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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