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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28. 2018

분노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집단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복원하기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사회 


  2014년은 분노의 해였다. 새해가 밝기 무섭게 폭로되었던 빙상연맹의 파벌 문제는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집단주의를 징후적으로 드러냈다. 그 이후, 심각한 인권 유린과 정경유착의 문제를 보여주었던 염전 노예 사건, 형제 복지원 사건 등이 이어졌다. 이윽고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폭발하면서 온 국민을 절망으로 몰아갔던 세월호 사건이 있었다. 그러한 슬픔과 분노가 채 가시기 전에 일어났던 ‘땅콩회항’ 사건은 과연 이 사회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게 했다. 


  2015년이 되었지만 분노는 사그라질 줄 모르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느꼈던 문제들은 어느 것도 제대로 해소되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관피아와 갑을관계를 비롯한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부패의 문제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고, 인권 유린을 비롯한 충격적인 사건들은 계속되고 있다. 집단 갈등은 사그라질 줄 모르며, 헌정 질서의 합리성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 사회를 버린 느낌이 든다. 


  한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감정’은 그 사회의 내적인 문제들을 드러내는 징후다. 우리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감정적 표현들 중 단연 ‘분노’가 으뜸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내부가 균열되고 왜곡되어 더 이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진화 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분노는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공격 또는 도피를 나타내는 원초적인 감정”(Dozier, 2003)이다. 우리는 삶의 한계상황이나 위기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 즉 사회 환경이 우리를 온전히 지탱해줄 수 없다고 느낄 때 분노는 만연해진다. 원초적 본능으로서 분노는 우리 내부의 균열 속에서 나타난다. 진화심리학적 전제에서, 생존과 그것의 위협은 가장 큰 대립 요소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내면 안에서 발생할 때, 우리는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적 본능은 현대 사회에 이르게 되면, 정신 내부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당위’와 ‘사실’의 분열이다. 


  친구가 약속을 어겼을 때, 연인이 나를 배신했을 때, 내가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 내면은 당위와 사실의 균열에 처하게 된다. 원래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관념이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표류하며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다. 부정당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정신이 무너지며 발생하는 게 분노다. 


  이러한 분노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첫째는, 나를 배신한 애인을 계속 증오하는 것이다. 증오란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집착하며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 분노가 특정 대상에 고정된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관념을 세움으로써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애인이 나를 배신하긴 했지만, 거기에는 알고 보면 나 자신의 오래된 잘못이 있었다는 식으로 후회의 관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는, 또 다른 정당한 관념을 통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 때, 정당한 관념이란 애인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며, 따라서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고, 내게는 더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세 번째 경우처럼 분노가 정당성과 결합한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확실한 변화와 갱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분노가 어떻게 흐르는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때때로 우리의 분노는 명백히 잘못된 것들을 향해 일어난다. 특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불합리한 갑질, 인권 유린, 부정부패 등을 향한 분노는 정당한 사회질서를 요청하고 있다. 물론, 이 때에도 그러한 분노가 정말 ‘새로운 관념과 사회’를 창출할 수 있을 만한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는지 더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한편, 만성화된 분노와 증오 역시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극단적으로 나누어진 정치적 대립은 과연 합리적 사회를 향한 발걸음인지, 단지 서로를 증오하며 승리감에 도취되는 집단적 증오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 그 외에 수치, 멸시, 시기로 점철되어 있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분노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왜곡된 집단주의


  모든 사회에는 일종의 착시현상이 있다. 늘 사회적으로 부각되는 거대한 문제들이 우리 삶을 뒤덮고 있다는 착시다. 이러한 착시는 언론과 여론의 연합으로 발생하며, 우리 삶을 지워버린다. 우리는 그 거대하고 뜨거운 사건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사실 그러한 사회적 사건과 내 삶은 다른 층위에 놓여 있다. 우리는 자주 그 두 층위의 간극을 계산하는 데 실패한다.


  분노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회에 일어난 일부 계층이나 특정 사람의 부당한 행위를 보고 분노하면서, 내 삶의 개선에 참여한다고 믿는다. 삶에서 여러 문제로 인해 쌓여왔던 분노는 사회적 이슈를 향해 집중됨으로써 해소되지만, 그로 인해 실제로 삶이나 사회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만성화된 분노의 문제는 오직 삶과 사회를 개선함으로써만 해소될 수 있다. ‘분노의 밀고나감’이 유효할 때는 그러한 개선을 실질적으로 가져올 때뿐이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특정 사회문화의 바탕 위에서 성립한다. 동물들은 자연이라는 삶의 조건 위에서 살아가지만, 인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특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에는 저마다 그 사회를 지탱하는 관념이 있는데, 이를 넓은 의미에서 ‘문화’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상당 경우 ‘분노’로 이르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문화에서 그 일차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문화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집단주의 문화’이다. 


  집단주의는 개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인데, 집단주의가 언제나 분노를 양상해내는 악질적인 문화는 아니다. 특히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에서는 집단주의가 오랫동안 사회를 유지하게 한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주의가 더 이상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에 전반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집단주의는 지속적으로 왜곡되어 왔다. 그 최초의 지점이 언제였느냐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강준만 교수는 조선시대의 관존민비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며, 보다 더 명백하게는 일제 강점기와 군부 독재 시절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기나길었던 백여 년 동안, 우리 사회와 생활 구석구석에는 집단에 복종하고 다양성이 억압받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일제 강점기의 집단규율체제나 군부시절의 군사문화는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학교, 회사, 관청 등에 그대로 남아서 우리 사회를 병들게 만들어 왔다. 더군다나 이런 집단주의 문화는 서로 비교하면서 속물적이고 획일화된 가치기준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정답문화’로 실생활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도 하다. 


  근래 문제가 되고 있는 현상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왜곡된 집단주의’로부터 발생한 것들이다. 집단주의의 전형적인 문제가 갑을관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갑과 을은 집단(회사) 내부에서든, 집단(회사) 끼리에서든 수직적이고 위계화된 집단주의 문화의 산물이다. 갑과 을이라는 집단적 명칭은 ‘개인 대 개인’의 만남을 사라지게 만든다. 거기에는 단지 집단적으로 규정된 이름만이 남아서 ‘인간(개인)을 인간(개인)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주리조트 참사나 세월호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원인으로 제기 되었던 관피아 문제, 염전노예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되었던 향판(지역법관) 문제, 빙상연맹의 파벌 문제, 그 외에도 각종 정경유착 문제 등 우리를 분노로 몰고 갔던 이슈들은 모두 ‘왜곡된 집단주의’라는 한국의 문화에서 도출된 것들이다.   



진정한 개인주의를 위하여


  현재 정치권이건 재계건 학계건 중대한 관심사 중 하나는 대한민국의 ‘분노정국’을 어떻게 해소할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가장 정확하고 쉬운 대안은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회사 구조를 수평적으로 제도화하고, 관피아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지역법관 제도를 폐지하고,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세제개편을 실시하는 방안 등이 매일 언론을 통해 들려온다. 


  이 같은 사회 구조나 제도의 개편이라는 방법은 언제나 간편하고 매력적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효과적인 법의 개편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의 문제를 접근할 때 문화에서부터 뿌리 깊게 내린 ‘집단주의’라는 차원을 등한시한다면, 어떠한 법이나 제도도 큰 실효성을 발휘하진 못할 것이다. 법에는 늘 틈과 구멍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편법사회’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탈세율과 부패지수가 이를 증명한다.


   오히려 더 핵심적인 문제는 법질서 자체보다 우리 삶과 생활,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문화에 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면서 스스로 ‘왜곡된 집단주의자’가 된다. 아파트 브랜드나 평수, 자가나 임대 여부로 계급을 나누는 주거문화, 누가 더 좋은 학교를 나왔는지로 위계를 세우는 학벌주의, 지연과 학연과 혈연에 집착하는 온정주의, 친척과 이웃과 동창 간 늘 암암리에 벌어지는 비교와 시기, 돈을 받고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들을 천대하는 갑질,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상명하복 등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 속에는 모두 하나같이 비합리적이고 병적인 집단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속에서는 오직 획일화된 ‘집단적 기준’들만이 작용하며, 개인이 개인으로 존중받고, 다양성을 인정받는 문화는 찾아볼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인주의란 타인을 배척하고 혼자 살아가겠다는 이기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 개인주의의 핵심에는 인간을 과거처럼 집단적 규정 속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 사람 그 자체로 보겠다는 태도가 있다. 개인주의가 자리 잡기 이전의 동서양은 모두 집단주의 문화 속에 있었다. 왕족, 귀족, 평민, 노비 등은 각각의 집단 속에서 위계화 되었고 그 속에서 인간은 각기 다른 개인이 아닌 ‘신분’이나 ‘가문’ 등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가 도래하면서, 개인들은 집단적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고 개성을 지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적 의미에서 집단주의는 그러한 개인들을 전제했을 때만 가능하다. 새로운 집단주의는 단일한 목표와 체계 아래 복종하며 스스로의 인격과 개성을 말살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개인의 추구와 집단의 추구가 조화를 이룰 때만 성립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그러한 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개인이 바로 서는 것이다. 


  왜곡된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이 압사당하는 현실로 인해, 우리 사회에는 분노와 증오가 만연하고 있다. 들끓는 분노를 정당한 실천으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진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변화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자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공동체를 고민하는 개인들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이룩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에릭 호퍼의 말을 되새기며 ‘분노사회’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에릭 호퍼는 『맹신자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정당한 분노와 사회의 변화는 오직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신과 화해한 개인들에 의해서만 실천될 수 있다. 



*계간 「우리교육」 2015년 봄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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