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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28. 2018

미안한 어른들의 사회

세월호 참사와 애도의 윤리

참사 앞에서 모두가 울었다. 대한민국은 멈추었고, 곳곳에는 슬픔과 애도, 분노만이 가득했다. 처음에 승객 모두가 구조되었다는 오보는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가볍게 지나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해가 진실이 되는 순간, 가볍게 덮여 있던 착각의 베일이 벗겨진 순간 사람들은 각자의 앞에 떨어진 ‘공통의 현실’에서 충격을 느꼈다. 저것은 누구의 현실인가? 침몰 속에 함께 끌려들어간 저 수많은 죽음들은 누구의 것인가? 왜 그들에게, 왜 우리에게, 왜 지금 여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흩어져 있던 각자의 현실들은 멈추었고, 어느새 모두의 것이 되어버린 하나의 진실 앞에 일상은 숨죽였다. 


처음에 우리는 이 사건을 믿지 못했다. 어떻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이 시대에 이와 같은 야만적인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이 ‘저절로’ 해결되리라 믿었다. 전문적인 구조 요원들과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이 저 야만의 바다로 사라진 이들을 다시 우리 문명으로 되돌려줄 거라 믿었다. 우리는 이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난 구멍을,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과 희망과 의지를 집어 삼켜버린 그 ‘검은 구멍’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수많은 눈물과 비통과 절규가 흩어져가면서 우리는 이 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억울함, 그 한 단어가 많은 이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유지시켜왔던 어떤 믿음들이 무너졌다. 그래도 우리가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 사회 속에서의 삶,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문명의 법아래 악인들은 심판받고 선한 자들은 보상받는다고 희미하게나마 믿었던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희망조차 사라졌다. 가장 무고한 자들에게 내려진 가장 혹독한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잃은 것은 확실히 ‘믿음’이었다. 우리의 삶이, 또 우리의 사회가 어디까지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이번 참사는 그 최후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모든 이들이 분노했다. 최초의 분노는 책임의식을 내다버린 선장과 선원들을 향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분노는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가능한 한 모든 존재들을 향했다. 평소에는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 했지만, 어느 정도는 믿고 있었던 정부라는 존재, 관료와 행정이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무엇도 이 야만을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억울했고, 분노했고, 참을 수 없이 슬펐다. 


대한민국을 슬픔에 빠트린 것은 단순히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 대한 연민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째서인지, 그 절박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애썼던 몇몇의 의인들의 눈물 앞에서 때론 더 큰 슬픔을 느꼈다. 그들에게 너무도 고마웠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더 슬퍼졌다. 우리는 점점 이 사태에 대한 어떤 죄의식을, 미안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어른이라서 미안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너희의 죽음에 내가 미안하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냉정하게 보면, 우리들은 이 사건의 제3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사고를 일으킨 것도, 희생자를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느 날 우리의 일상에 떨어진 이 참극이 ‘우리의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 와중에 보였던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문제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만들어왔던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도 결코 면책 특권이 없음을 안다. 우리 사회의 온갖 불합리함과 사회 없는 사회의 자화상이 축약된 이번 사건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왔던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왔던 사회를 목도하게 되었다. 설령, 우리가 그들을 죽인 살인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 ‘방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이 일이 우리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정부를 비판하고, 일련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모든 불합리함과 시행착오들을 향해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자책하고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미안함을 느낀다. 타인에 대한 어떠한 책임의식도 없이 도망친 책임자들, 그들이 만들어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사. 그것은 타인의 불행에 마찬가지로 무감각하게 살아왔던, 그저 우리의 앞날만을 걱정하고, 우리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전전긍긍 살아왔던 우리의 일상에 던지는 거울과 같았다.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든 이들의 모습에서,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을 향해 분노하면서 자신을 향해 자책했다. 이 사태에 대해, 이 죽음에 대해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는 ‘하나의 적’을 색출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그 죄인의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안하다고 눈물 흘렸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면, 그들에 대한 미안함이다. 우리는 잠시나마, 타자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미안함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너져가던 대한민국에서 잠시나마 ‘사회’의 가능성을 그들의 눈물을 통해 맞이할 수 있었다. 사회를 지켜내는 힘, 바꾸는 힘, 새롭게 건설하는 힘은 그 미안함을 잊지 않는 개인들, 끝까지 책임을 감수하고자 하는 우리들로부터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미안한 어른들’이 되고자 했다. 언제 우리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의 이익이 아닌 타자들을 이토록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결코 이 슬픔을 잊어선 안 된다. 애도는 이어져야 하며, 사회는 지켜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과, 이 사회와, 이 사회의 위정자들을 끊임없이 애도의 법정에 세워야 한다. 용서하지 않고, 잊지 않고,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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