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이상이 너무 높은 사람은 사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다. 높은 이상에 자기를 두면서 자기가 그만큼 대단하다고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 이상 만큼 드높고 대단하지 않은 현실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인간인 나는 내 안의 이상만큼 대단하지도, 완벽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 그렇기에 그 이상의 이면에서 나는 나를 미워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자신의 완벽한 모습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가령, SNS 속에 필터 씌워 전시된 나의 가장 완벽한 이미지, 타인들로부터 윤리적이라 칭송받는 위선적인 이미지, 사람들이 대단하고 치켜세워 올려주는 곳에 있는 이미지는 사실 진짜 내가 아니다. 그런 나를 갈망하고, 그런 나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자기 자신과 멀어진다. 마치 거울에서 태어난 도플갱어가 내 행세를 하고 다니면서 나의 사랑을 받는 일과 같다. 진짜 나는 거울 뒤에 갇혀 울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나 자신은 물론이고 누구도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 내가 이상적이라 믿고 싶은 그 사람이 사실 세상에서 가장 위선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내가 존경하고 따르며 신에 가까운 존재라 생각하는 그 어떤 존재가 집에 혼자 팬티만 입고 앉아 배를 긁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상 따위는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우리는 나의 이상을 믿는 방식으로 타인들을 이상화하면서 자기를 미워하기도 한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청년 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나 또한 나를 미워했다. 내 안에는 너무 높은 이상이 있었다. 세계적인 대문호나 역사 속 위대한 지식인 정도가 되지 못하면, 내 삶은 실패한 것이라 믿었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는 그런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나 <죄와 벌>의 주인공은 늘 나폴레옹쯤 되는 인물을 자기 안에 설정해두고, 비참한 자기 현실과의 괴리에 좌절한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모짜르트 같은 천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좌절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상을 갈구하다 자기를 미워하는 건 청년 시절의 전매 특허 같은 것이다.
나는 세계적인 대문호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평범한 한국의 작가 한 명이 되길 선택하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의 청춘이나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 같은 걸 써서는, 알베르 카뮈나 헤르만 헤세 같은 존재로부터 멀어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내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고 한계였다. 당시 기준으로 초판 3천부 정도를 팔고, 재쇄 정도를 찍는, 그냥 세계에서 알아줄 리 없는, 지구 어느 구석의 작은 반도 땅 작가 한 명이 되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사랑할 방법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물론, 이상이 높았던 시절에는 그만큼 이상으로 간절히 가고 싶었던 마음이 노력과 끈기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 이상과 내 현실의 간극을 메우고자 엄청나게 읽고 썼다. 그 거리를 좁히려는 마음이 노력의 동력이었고, 어찌 보면, 나는 지금도 그 시절 쌓은 '읽기와 쓰기'의 근력으로 먹고 살고 있다. 정신분석학자 이졸데 카림에 따르면, 내 안의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에서 '무한동력'이 생긴다. 0.999...로 이어지는 무한소수는 결코 1에 닿을 수 없기에 끝없이 나아갈 수 있다.
수학에서는 0.999...가 무한히 이어지다 보면, 결국 1에 닿는다고 보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다. 아마 이상에 완전히 닿는 날, 즉 1이 되는 날은 죽는 날일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어느 시점까지는 나아가되, 어느 시점에서는 멈추고 거기까지가 자신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나아가면서 자기 자신과 이상 사이를 조율해야 한다. 나는 1일 거라고, 1이 될 거라 믿었지만, 사실은 0.9999321이나 0.998376의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도 믿으며, 자기 삶의 모양을 만들어가면 된다. 1이 아닌 0.938713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 때, 삶에서 사랑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