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두어달 전까지 매일 글을 썼다. 할아버지가 쓴 글들은 세상이나 사회에 대한 할아버지의 식견이 담긴 글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몇 년 전부터 내게 SNS 사용법을 자주 물어보았고, 나는 할아버지가 SNS에 글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할아버지는 100세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마지막으로 찾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일이 적어진다. 세상에 기여하거나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고 쓸모 있는 일도 줄어든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 글을 쓰는 일이라 생각한 듯하다. 할아버지가 떠난 후, 집에 가서 보니 할아버지가 매일 휘갈겨 쓰던 A4 용지들이 소파 옆에 있었다. 생각하고, 쓰고, 말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자주 은퇴 이후를 생각한다. 아마 육십대나 칠십대쯤이 될 것이다. 물론, 그때도 소일거리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을테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 내 남은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물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손주를 돌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그러나 손주는 없을 수도 있고, 손주가 있는 것도 잠깐이다. 나는 삶의 후반기에서, 어떤 의미로 내 삶을 채울 것인지 생각한다.
동화를 짓는 노인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한다. 아이들을 위하여 오랜 세월을 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동화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아니면, 젊은 사람들이 쉬이 할 수 없는 공부에 몰두해볼까 싶기도 하다. 오랜 고전이나 역사를 공부하기엔 젊은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 대신 내가 그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야기하듯 잘 풀어낸 책을 써주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해보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아마도 인간은 평생 자신의 쓸모를 찾는 듯하다. 자신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이 인간 같기도 하다. 젊은 날은 몸뚱어리 하나로도 쓸모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쓸모와 가치를 유지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요즘 나의 목표가 있다면, 나이들수록 쓸모 있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더 책을 열심히 읽으려 하기도 한다. 몸은 늙어가도, 그만큼 쌓인 시간이 자산이 되는 삶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에는 '일가'를 이루어가는 존재들이 부럽기도 하다. 오랜 옛날, 자신의 가문을 일구고 가업을 남긴 사람들이라든지, 학교를 세우고 죽을 때도 자기가 세운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초대 이사장이라든지, 학파를 만들고 세월이 흘러도 남을 연구와 의지를 남긴 학자 같은 사람들의 삶 같은 게 묘하게 멋져 보인다. 물론, 한 평생 기쁨을 누리다 바람처럼 떠나갈 것이 삶인데, 애써 무언가 남긴다는 게 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이어질 무언가를 남기며 허무와 맞서싸우는 방식을 발견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온갖 열정들로 생의 전반부를 보내고, 슬슬 중반부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생각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걸 느낀다. 방랑저처럼 세계를 거닐다 떠나고 싶은 게 청춘의 욕망이었다면, 좋은 것들을 잘 축적하고 보존하고 지켜서 오랜 생을 의미있게 더불어 잘 살아보고 싶은 그런 욕망이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중년의 시작이라는 것도 역시 삶의 또다른 시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