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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28. 2018

유성우가 내리는 밤에 시작된 운명

다시 쓰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

별을 삼키며 시작된 자유


황야를 떠도는 한 채의 성이 있다. 온갖 소문을 이끌고 다니는 성이 나타난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성은 이따금씩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러면 마을 처녀들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성을 구경하러 몰려나갔다. 성의 주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가 아름다운 처녀들의 심장을 빼앗아 삼킨다는 소문만큼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처녀들은 그런 소문에 두려움에 떨면서도, 내심 어느 날 밤 자기 집 창문으로 성의 주인이 나타나는 것을 상상했다. 성은 늘 잠시 보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러면 처녀들은 자기 주변에 누군가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두리번거리면서도, 누구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누구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에, 또 누구도 자기보다 아름답다고 결정되지 않은 사실에 말이다.


성의 주인을 아는 사람도, 본 사람도 없었지만 그의 이름만큼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는 ‘하울’이라고 불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늘 마을의 변방을, 그러니까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않는 황야를 떠돌았다. 황야 너머에는 아름다운 산맥과 골짜기, 무한히 펼쳐진 들판과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마법사들이 득실거린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좀처럼 그곳으로 향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시작된 삶을 이어나갔고, 이따금 마법사가 되겠다는 이들만이 하나둘 황야 너머로 사라질 뿐이었다.


하울 역시 처음에는 자신이 황야를 떠돌게 될 줄 몰랐다. 그는 무시무시한 소문과 달리, 누구라도 보면 첫눈에 반할 법한 금발과 푸른 눈빛을 가진 청년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아름다운 처녀들의 심장을 빼앗고 다닌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실일 법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 마을, 저 마을을 전전하며 누구도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가운데, 처녀들 사이를 거닐었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기도 했다. 악랄한 마법으로 그랬다기 보다는, 그저 그가 가진 유혹의 기술들, 즉 아름다운 금발과 부드러운 말투, 상대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럴 수 있었다. 물론, 때로는 유혹의 필연적인 결과인 실연도 그를 피해갈 수 없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 한편으로는, 하울도 그저 지극히 인간적인 한 청년에 불과했다. 물론, 소문에는 진실도 있었다. 그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고, 계약은 그를 점점 검은 깃털이 뒤덮인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선택한 자유의 대가였다. 모든 것은 어느 밤, 들판에 무수히 떨어지는 유성우에 취하면서 시작되었다. 그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왕궁에서 촉망받는 마법사로 자라나고 있었을 때 그는 자기가 사랑하던 들판에 유성이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달려 나갔다. 여기저기 떨어지는 유성들 사이에서, 별 하나를 붙잡고 삼켰을 때 그의 삶은 달라졌다.


소년은 별을 삼켰고, 별은 소년의 심장을 받았다. 그렇게 계약이 성립되었다. 소년과 별은, 마법사와 악마가 되어 영원한 연대를 맺었다. 악마가 된 별은 황야의 한 가운데 성을 쌓아올렸다. 마법사가 된 소년은 그 성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원래는 자신이 평생 갇혀 있었어야 할 왕궁으로부터 떠났다. 무한하게 펼쳐진 들판과 산맥, 황야와 호수가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는 원래 왕궁 마법사의 마지막 제자였고, 그랬기에 앞으로 왕궁 전체를 짊어지는 부담과 명예를 얻을 터였지만, 그 무거운 짐을 벗어던졌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렇게 탄생했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 자유에 대한 갈망, 무한하게 펼쳐진 공간을 거닐고 싶다는 소망이 악마와의 약속 안에서 이루어졌다.



자유의 대가


하울은 자유를 갈망하며 떠났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다. 그는 ‘황야의 자유’라는 것이 사실은 지독히도 외롭고 두렵고 공허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왕궁에 갇혀 살 수밖에 없던 시절은 권태로웠지만, 동시에 안정감을 주었다. 반대로, 황야의 자유는 고독과 두려움을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택한 방법은 자기를 ‘여러 개’로 쪼개는 것이었다. 이름을 새로 만들고 모습을 바꾸어서 왕궁에 출입하는 삶을 사는 한편, 또 자유는 자유대로 누리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이중의 욕망 속에서 분열된 삶이 시작되었다.


소속이 없는 삶, 자기 자신을 하나로 온전하게 통합시켜주는 인간적 유대가 없는 삶,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끝까지 자기 자신의 독립에 집착하는 자유로운 삶은 그에게 나르시시즘을 낳았다. ‘자유로운 나’는 곧 ‘아름다운 나’가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바라보아야 했다. 그렇게 누구도 바라봐주지 않는, 바라봐줄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이야말로 그 모든 걸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었다. 아무도 그를 몰랐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당신은 정말 자유롭고 아름답고 멋져 보여.’라고 속삭여야 했다. 그의 방은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침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방어하는 요새가 되어야 했다. 그는 자기 방에 수도 없이 부적을 만들어냈다.


그는 한 때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었던, 그 이후 늘 그의 심장을 빼앗기 위해 자신을 찾아다니는 ‘황야의 마녀’를 지독히도 두려워했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 범위 밖에 있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무렵, 그는 삶이란 자기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타인들’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 관계의 부담 위에 서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청년이 되었을 때는 모든 게 이미 늦어 있었다. 그에게는 그를 쫓아다니는 왕궁 마법사 설리먼과 황야의 마녀라는 적들이 생겨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그의 ‘자유’를 빼앗고 싶어 했다. 그의 자유를 지탱해주는 건 오직 계약에 의해 서로에게 구속된 악마뿐이었다. (물론, 그 악마조차도 그를 버리고 달아나는 걸 꿈꾸길 하지만.) 결국 그는 자유와 아름다움이라는 관념, 그 관념이 만들어낸 고독과 나르시시즘 속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외로울 때면, 그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어릴 적 처음 별을 삼켰을 때, 그는 호수 건너에서 다가오는 한 명의 소녀를 보았다. 자기 앞에 펼쳐질 자유의 대가를 아직 알지 못했던 소년, 그저 별빛에 취하고 무한한 자유가 있을 거라는 기대에 설렜던 소년에게 다가온 소녀는 자신이 “꼭 너를 찾아갈 거라고, 미래에서 자신을 기다려줘.”라고 말했다. 소년은 아련하고 슬픈 눈빛으로, 연민에 가득 차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사라진 그 소녀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자신과 무슨 관계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소녀가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소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그렇게 마을의 처녀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소문에는 진실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비록, 하울이 처녀의 심장을 빼앗고 다니는 건 아닐지라도, 그는 어릴 적 보았던 그 소녀를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소녀라면 자기도 모르게 내몰린 이 고독, 또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저주, 그럼에도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그를 꺼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녀는 분명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어쩌면 이제 그 미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맹목적인 자유’ 속에서 황야를 떠돌던 그에게 목적이 생겼다. 그 소녀를 찾는 것, 그 소녀가 누구이고 자신에게 무엇을 줄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머릿속에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그 소녀를 만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오랜 세월동안, 그 소녀를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소년과 소녀의 영원회귀


소녀는 어느 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마을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녀들은 무섭다고 깔깔대면서도 성을 구경하러 밖으로 나갔다. 모자를 만드는 일을 하던 소녀, 소피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몰려다니는 그런 처녀들의 기분에 동화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삶이란 마을의 다른 처녀들이 누리는 것과는 조금 동떨어져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오히려 저 처녀들은 그녀의 어머니와 더 닮았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어딘가 돌아다니기 바쁜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가 물려준 조그마한 모자가게에서 매일같이 모자를 만드는 게 그녀의 삶이었다. 그녀는 지나가는 기차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하늘이 보이는 자신의 자리에서 바느질을 하는 삶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녀는 그 삶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렇게 고요하고, 별달리 대단한 사건도 없고, 딱히 신날 것도 슬플 것도 없던 그녀의 삶에 변화가 시작된 건 바로 그 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나타났다고 사람들이 떠들던 날이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거리는 전쟁에 나가는 군대를 배웅하는 인파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또 처녀들은 위풍당당한 군대와 군인에 열광했다. 소피만이 그런 시끄러운 거리를 벗어나 뒷골목을 걸었다. 문제는 골목에 있던 젊은 군인 둘이 그녀를 막아서면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제 막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의 여느 군인들이 그렇듯, 마을 처녀를 한 명 낚아채서 하루를 즐기고 싶어 했다. 거기에 호응해줄 아가씨들이야 지천에 널려 있었지만, 그들은 눈을 반짝이며 자기들을 바라보는 흔한 아가씨들 보다는, 겁 많고 도망치려하고 숨으려 하는 작은 동물 같은 소녀를 범하고 싶었다. 소피는 그들에게 비켜달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으나, 그들은 비켜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흑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려는 찰나,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한참 찾았잖아.”


옆에서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녀를 찾았다. 평소라면 다른 남자들이 여자를 몰아세우고 있든 말든 그냥 지나쳤겠지만, 우연히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경계심과 두려움에 가득한 눈빛, 그는 그 눈에서 오래 전의 그때로 단숨에 날아갔다. 그를 바라보던 눈, 오랫동안 그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던,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눈이었다. 하울은 천천히 소피에게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모든 게 확실해졌다. 그는 차분하게 그녀 옆에 섰다.


그렇게 영원히 반복될, 그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하울은 마녀의 부하들에 쫓기고 있던 터라 그녀를 구해준 다음에는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녀는 소피와 하울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소피에게 할머니가 되는 저주를 걸어버린 다음 하울을 찾아가라고 한다. 그렇게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피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찾아 황야로 나서게 되고, 둘이 다시 만나면서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모자를 만들며 매일같이 이어나가던, 흔들릴 것 없고 새로울 것 없던 일상에 어느 날 도래한 저주. 소녀는 그렇게 자기가 원한 적 없던 삶의 우연에 휘둘리게 된다. 그러나 하울에게 ‘미래에서 기다리라고’ 한 소녀가 다름 아닌 소피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녀는 나중에 우연히 하울의 과거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그녀 스스로 그녀의 삶을 선택했다. 바로 자신이 하울을 찾기를, 또 하울이 자신을 찾기를, 그래서 그녀가 하울을 만나기를, 결국 서로가 서로를 구해내기를 그녀 스스로 선택했다.


지금의 우리를 선택한 건 과거의 나일까? 아니면 오히려 지금의 내가 항상 과거의 나를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미 잊혀버린 무수한 과거들이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아주 적은 순간들이 있다.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던, 그리고 여전히 믿고 있는, 수많은 사소한 순간들은 이미 우리 안에서 사라졌다. 그 과거들은 선택받지 못한 채 영원히 기억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직 소수의 과거들만이 현재에 선택을 받았고, 끊임없이 받고 있다.


소피는 하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한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미래에 의해 선택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자, 그 중 몇 개의 순간이 나중에도 남게 될까? 그리고 지난 한 달과 일 년을 되돌아보자, 그 중 몇 개의 날들이 선택되었는가? 무심코 지나가는 순간들과 날들 중에 어떤 날은 틀림없이 미래의 선택을 받는다. 그건 지금 이 순간일 수도, 다음의 어떤 순간일 수도 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그러나 우리 스스로 제어할 수도 없고 선택하지도 않았다고 믿어지는 그런 운명적인 사건, 그런 사랑의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삶에, 삶의 우연에, 운명에 휘둘릴 때, 이 모든 게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은, 그렇기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을 내맡기게 되는, 모든 걸 쓸어가 버리는 그 사건에 자기를 내어줄 때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게 이미 우리의 선택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미 도래한 그 운명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 자체가 이미 선택이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그렇게 삶이 변화하고, 새로운 이야기가 쓰이고, 우리는 그 운명을 살아낸다.


저주에 걸려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피는 거울을 보고 놀라긴 하지만, 한편 신기할 정도로 담담하다. 그녀는 운명에 순응한다. 그녀의 직감은 그 저주가, 그 절망적인 상황이, 그 끔찍한 사건이 그녀에게 ‘당연히 도래한 것’이라는 예감 속에 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낸 하울을 찾아간다. 당신이 나를 찾았다면, 이제는 내가 당신을 찾을 차례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당신은 다시 나를 찾게 될 것이고, 또 나는 다시 당신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영원한 순환 속에서 우리는 어떤 숭고함을 느낀다. ‘영원회귀’라고도 불리는, 선택하는 순간의 무한한 반복, 그 끝나지 않는 여정이 우리 삶의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고 해도-그게 설령 이별이나 절망, 상처나 좌절이라 할지라도- 나는 다시 당신을 선택하겠노라고, 그 순간이 아무리 되돌아와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리고 당신 역시 나를 선택할 것을 믿는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 일을 영원히 반복할 것이다.



관계로의 진입


소피가 하울의 성에 들어서면서, 공고하기만 했던 하울의 나르시시즘적 세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하울에게 성이란, 단순히 황야를 떠도는 ‘물리적 세계’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성은 그 자체로 하울의 정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즉, 다른 이들로부터 결코 침범 받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의 관념적 세계 속에서만 살 수 있게 해주던 ‘정신의 집’이었다. 하울은 자신과 계약한 악마 케루시파의 도움을 받아, 그 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은폐의 마법을 걸고, 또 끊임없이 떠돌게 했다. 그러나 이제 그 집에 들어온 사실상 최초의 손님, 소피로 인해 하울의 세계도 흔들린다.


처음에 하울은 자기 성에 소피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마치 원래 있었던 사람처럼 소피를 대한다. 이미 할머니로 변해버린 상태의 소피였지만,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을 걸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미’ 예전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같이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문제는 소피가 엉망진창에 지저분했던 성을 청소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다.


하울이 외출한 동안, 소피는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면서 하울의 목욕탕도 건드리게 된다. 그러다 성에 돌아온 하울이 목욕을 하게 되는데, 갑자기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하울이 뛰쳐나온다. 달려 나온 하울의 머리카락은 엉망이 된 상태였다. 그는 머리카락의 염색을 비롯해 ‘자신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목욕탕에 걸어놓았던 것이다. 이것이 소피의 청소로 인해 풀려 버리자, 그는 분노와 흥분 사이를 오가다가 곧 절망해버린다. 그 절망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 곧 자신의 몸을 액체로 만들어버리고 성 자체를 무너뜨릴 정도가 된다.


단지 하울의 괴팍한 성격을 드러내는 장면 같지만, 이 부분에서부터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자기만의 성을 짓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오직 자유와 아름다움만을 믿고 자기 자신을 구성하던 청년에게 처음으로 소피라는 ‘타인’이 들어선 것이다. 그 타인은 청년의 나르시시즘을 박살내기 시작한다. 청년이 스스로 지독히 아름다운 존재라 믿고 있던 자기 자신, 자기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자기만의 세계를 누리고 있다고 믿었던 자폐성이 고발되는 것이다.


사랑을 정의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아마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사랑의 시작’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보던 방식이 위기에 처하고 ‘나를 바라보는 타인’이 등장함으로써, 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의 우주는 무너진다. 그렇게 타인의 우주가 나의 우주와 뒤섞이기 시작하며, 때론 전복되었다가, 때론 화해하는 그야말로 ‘전쟁 같은 사랑’이 시작된다. ‘당신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것만큼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이미,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 이후에는 말이다.


이후 하울은 왕궁에서 전쟁에 참여하려는 명령을 받는다. 정확히는, 하울은 ‘펜드라곤’이라는 이름의 마법사로 변장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 펜드라곤이 그런 명령을 받은 것이다. 하울로서는 전쟁에 참여할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왕궁에 가서 변명을 해야 했지만 왕궁 마법사이자 자신의 스승인 설리먼이 버티고 있는 곳에 갈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하울에게는 좋은 방책이 생겼는데, 바로 소피를 ‘펜드라곤의 어머니’라고 속여서 왕궁에 보내어, 전쟁 참여가 불가함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소피를 왕궁으로 보내고, 자신도 위장하여 소피를 뒤따른다. 하울이 말하길, 이렇게 왕궁에 찾아올 수 있는 것 역시 소피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로소 자기 밖으로 나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하울은 이미 왕궁으로 가게 되면, 설리먼이 모든 걸 알아차리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에게 소피는 핑계일 뿐이었다. 그는 다만, 설리먼을 만나고, 그를 극복할 계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껏 도망치기만 했던 삶에서 그가 소피로부터 용기를 얻어 현실을 직시하리라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해야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과거였던 것이다. 그 과거의 중심에 자신의 스승인 설리먼이 있었던 것이다.


나르시시즘, 그것은 도망치는 삶이다. 자기 바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성을 쌓고, 그 성 안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소피로부터 시작된 관계의 삶, 그것은 직시하고 마주하며 부딪히는 삶이다. 이 이야기의 급격한 진행은 그와 같은 급진적인 전환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자신 안에 갇혀 있을 때,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밖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모든 것은 사건이 된다. 그렇기에 사랑을 ‘사건’이라 부르는 것이다.



끝난 삶, 시작되는 삶, 되풀이되는 삶


하울과 소피의 삶은 한 번 끝난다. 그 계기는 ‘전쟁’이다. 이 이야기에서 전쟁은 묘한 데가 있다. 처음부터 전쟁의 상황이 제시되지만, 그 전쟁은 하울과 소피의 이야기 바깥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전쟁은 전쟁대로, 하울과 소피의 삶은 그들의 삶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하울과 소피는 왕궁의 설리먼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도망친 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울은 성을 완전히 개조하여 어릴 적 자신이 별을 삼켰던 들판(소피를 최초로 봤던 곳)과 소피가 원래 살던 모자 가게로 이어지도록 바꾸어 놓는다. 그렇게 새로운 성을 짓자마자, 전쟁은 그 공간들에 침범하기 시작한다.


전쟁은 이전까지 황야를 떠돌며 안전하게 지탱되었던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하울은 거기에서 다시 성의 문을 닫아 버리고, 또 다른 황야로 떠도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울의 선택은 잘 이해하기 어렵고 오묘하다.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 전쟁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성 밖으로 뛰쳐나가 전쟁기계들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우리는 하울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고 그가 멍청하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차피 개인이 전쟁이라는 거대한 힘을 바꿀 수는 없다. 오히려 그는 이제 겨우 찾은 그 사랑에 집중하는 게 현명하다. 전쟁터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면, 달아나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는 게 지혜로울 수 있다. 하지만 하울은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에게 ‘도래한 사건’을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 정확히 말해, 그는 이제 도망치는 삶이 아니라 지키는 삶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기가 사랑하게 된 소피, 그리고 그 소녀가 살던, 그 소녀와 함께 다시 살아가기로 했던 그 마을이다.


하울은 그 순간에 그 마을을 버리고 소피와 함께 도망쳤다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리는 삶에서 납득하기 힘든 종류의 고집을 갖게 되고, 그 고집을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 여기에서 물러난다면, 혹은 여기에서 떠난다면, 혹은 여기에서 포기한다면 결코 다시 되돌아올 수 없으리라는 예감에 휩싸이고, 그런 예감은 대체로 적중한다. 삶이 이끄는 여정에서 우리가 운명적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앞과 뒤로 나눠진 갈림길에서 우리는 환상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걸 본다. 저 길은 비록 두렵지만, 저 길만 지나게 되면 도달하리라 믿어지는 어떠한 환상, 그 환상에 대한 동경과 욕망 속에서 우리는 고집을 부린다. 하울도 그랬다. 그는 이 전쟁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이 전쟁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그 고집은, 그의 예감대로 옳았다.


그는 전쟁에서 상처입고 추락한다. 성은 무너지고 몰락한다. 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소피는 하울의 과거로 가는 문을 발견하고 그 문을 연다. 그리고 그 영원히 이어질 반복을 시작한다. 바로 어린 시절의 하울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찾을게. 미래에서 기다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소피는 쓰러진 하울에게 심장을 되돌려준다. 심장은 하울이 그 어린 시절, 별을 삼키면서 계약을 맺고 별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바로 그 별이 악마 케루시파였다. 소피는 하울의 과거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고, 비로소 하울에게 심장을 되찾아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울과 케루시파는 서로를 묶어두고 있던 구속의 계약에서 벗어난다. 케루시파는 자유를 되찾지만, 결국 다시 되돌아와 성을 지어 올린다. 이제 그들에게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하울과 소피는 다시 세상을 떠도는 성에 올라탄다. 미래가 과거를 부르고, 과거가 미래를 부르며 되풀이되던 그들의 삶은 이제 드디어 쓰이지 않은 삶을 써나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이야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새로 시작된 삶이 더 진정한 자유 속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울은 자신을 자기 안에 가두고, 세상으로부터 도망 다니던 삶에서 벗어났다. 케루시파 역시 계약에 의해 구속되어 강제로 성을 운용하던 삶에서 자유로워졌다. 소피는 그녀를 옭아매던 노동과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어쩐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하울은 여전히 움직이는 성에 타고 세상을 거닐 것이다. 케루시파는 자진해서 움직이는 성을 운용할 것이다. 소피 역시 성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하울은 더 이상 고독과 공포와 불안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케루시파는 더 이상 해방을 갈망하며 벽난로 바깥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 소피는 더 이상 체념하듯 운명에 순응한 태도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안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최초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들의 삶은 이전과 같이 되풀이된다. 그러나 모든 게 달라졌다. 그들이 사랑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결핍은 해소되었고, 그들의 자유는 완전해졌다. 사랑과 자유는 그렇게 한 몸을 이루었고, 그것이야말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떠받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욕망하고 갈망하며, 그로 인해 고통 받고 추락하며, 또 원하는 것을 얻고 만족한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실패가 따라다니고 있으며, 성취 또한 기다리고 있다. 삶의 여정에 자신을 내맡길 때, 우리는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들과 마주한다. 그 사건들은 이미 우리의 과거에 예견되어 있었고, 미래에서 늘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과, 추락과, 상승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야 우리는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끝끝내 이 자리에 있어야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또 그로 인해 얻게 될 진정한 자유였음을.



* <크리틱칼>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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