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예측가능성을 만드는 것 같다. 인생도, 세상도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당장 언제 주식시장이 붕괴되어도 이상할 게 없고, 내가 다니는 회사가 망하거나, 다음 달부터 거래처와의 거래가 끊어지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이 예측불가능성은 우리 삶의 근본적인 스트레스이기도 하고, 동시에 당연하게 주어진 필연적 조건이기도 하다.
삶을 건설하는 일이란, 이 예측불가능한 세상 속에서 예측가능성을 만드는 것 같다. 세상이 무너져도 매달 50만 원씩 적립하는 통장은 삶의 최후의 기반이 된다. 매일 운동하여 만드는 몸은 은행조차 파산해도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남는다. 매일 글쓰는 일은 직장에서 쫓겨나도 오늘 할 일을 남겨두어, 미래로 가는 열쇠가 된다. 즉,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예측가능성은 '꾸준한 반복'이다.
'꾸준한 반복'은 단순한 단어이지만,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일단, 꾸준함의 반대는 단발성이다. 단발성, 일회성으로 만들어놓은 것들은 언젠가 무너지기 쉽다. 책을 한 권 쓴 것으로는 그것이 삶에 지속가능한 안정감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매년 책을 쓴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평생을 지켜나가는 힘이 된다. 내 삶의 모든 게 달라져도, 내년에도 책 한 권 쓸 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것이 유일한 예측가능성과 안정감으로 삶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도 믿게 된다. 모든 걸 '잃어도' 나의 '이어짐'은 예측 가능하게 남는다.
반복에는 그 자체로 예측가능성이 담겨 있고, 동시에 '행동'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즉, 내가 매일 반복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측가능한,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봄직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상실할 수 있고, 믿었던 부동산도 폭락할 수 있고, 영원히 다닐 거라 믿었떤 직장도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나의 행위는 책임질 수 있다. 그 반복적 행위가 삶에 남아 있다면, 내 삶은 그 속에서 숨쉬며 이어진다.
미국의 작가 폴 오스터는 평생 글을 썼는데, 말년에 이르러 지옥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손녀와 아들이 6개월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해에 본인은 폐암 진단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계속 글을 썼고, 생에 마지막 책까지 출간한다. 글쓰기가 그의 평생, 죽음 바로 직전까지도 그의 삶을 이어주는 예측가능성이자 힘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삶은 바로 그 '자기만의 예측가능성'이라는 레일 위에 발을 내딛는 레이스 같은 것이다.
삶이라는 게 별 거이기도 하고,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삶에는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펼쳐지고, 예측할 수 없는 온갖 사건사고들도 일어난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면에서 보면, 그냥 매일 하던 일을 죽을 때까지 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그렇게 '단순명료하게' 설명하기가 명쾌한 삶일수록, 좋은 삶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떤 감정기복이 도래하고 세상의 사건사고들이 도래하든, 매일 해야하는 '그것을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 나쁜 삶일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대개 개개의 삶이란 바로 그렇게 한 '그것' 자체이고, '그것'으로 얻는 고유성과 가치 안에 있다. 그것이 기도이든, 달리기이든, 저축이든, 글쓰기이든 말이다. 그러고 나면, 그 삶은 기념할 만한 것이 된다. 매일 아침 동네에 가게를 열고 비질을 하던 책방 할머니처럼, 모든 마을 사람이 그를 바로 그 삶으로 기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