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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정을 사랑하는 것

by 정지우

청년 시절까지 꿈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었다. 저 바다 너머, 하늘이 시작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특히, 가을이 와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면, 투명한 빛을 따라 그저 무한히 어딘가로 가고 싶었다. 막연하게, 여행길에서 또래의 소녀를 만나 기차를 타고 다시 돌아올 리 없는 여행을 떠나는 로드무비 같은 꿈도 꾸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디로 가서 살 건데, 라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그러나 청소년 시절이 끝나고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정말로 멀리 떠나진 않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나는 주로 자취방이나 학교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한 것은 멀리를 꿈꾸며 글을 쓰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청년 시절이란 아주 간절하게 인정 욕망에 시달리는 때가 아닌가 싶다. 부모의 품을 떠나 인정받고 싶어 갈망하는 시기였고, 나는 글을 써서 인정받고, 작가가 되면 멀리 떠나게 될 거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청춘이 끝나고, 이제 마흔쯤 되어 돌아보니, 그 때 내가 믿었던 '떠남'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떠나서 어디 갈거냐.'라고 그 시절의 나에게 묻게 되고, 어딜 가든 그곳의 현실을 살아야 한다, 라는 결론을 미리 내리게 된다. 유럽이든, 미국이든, 일본이든 떠난 다음에는 그곳에서 돈을 벌고, 밥을 해먹고, 집을 가꾸며 살아야 한다. 어릴 적 보던 만화에서처럼, 그저 끝도 없이 대륙을 여행하며 살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여행조차도 사실은 온갖 위험과 어려움으로 점철된 현실이라고.


지금에서 보니, 진심으로 떠난지 오래되었다. 30대는 내내 정착을 위한 투쟁이었다. 이 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하여 인정받고 자리잡으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래서 서울의 한 동네에 간신히 자리잡고 산지도 몇 년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야 내가 그토록 떠나고 싶어해서 온 것이 여기인가, 생각하게 된다. 결국 그 떠남이라는 것은 끝도 없는 지평선을 향해 대륙 횡단 열차를 타는 게 아니라, 걸어서도 갈 수 있는 멀지 않은 어느 동네였고, 다만, 내가 바랐떤 것은 멀리적 떠남이 아니라, 세상에서 필사적으로 인정받고 자리잡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허태준 작가가 일전에 선물해준 <룩백>이라는 만화책을 보았다. 단권짜리 책이라 삼십분이면 다 읽을 수 있었다. 만화가를 꿈꾸는 청년들의 이야기였다. 만화가를 꿈꾸는 두 청년이 청소년시절 내내 같이 한 방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낮없이 서로 기대어 그림 그리는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꿈꾸는 시절의, 어찌 보면, 아직 갇힌 채로 저 멀리만 꿈꾸는 시절의, 인정받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시절의 숨막히는 아름다움을 그려낸 이야기다. 아름다운 건 꿈에 이른 것보다는 꿈꾸는 과정의 일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 시절 꿈꾸던 것 만큼 멀리 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꿈에 그리던 '그 먼 곳'은 저기 어딘가 실제로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배운 것도 있다. 사실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리운 순간들은 궁극의 도착지에 있는 게 아니라,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 속에 있다는 걸 말이다. 꿈을 다 이루고 나서, 아이를 다 키우고 나서, 돈을 세상에서 제일 많이 벌고 나서, 세상에서 제일 유명해지고 나서 가장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는 게 아니다. 삶은 오히려 거기까지 이르는 걸음걸음들 속에 있는 것이고, 의외로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는 별 볼 일 없을 수 있다. 볼 일은 그 여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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