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느끼는 것 하나는, 비관론이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비관할 만한 일들이 가득하다. 대한민국 인구소멸, 기후변화, AI로 인한 직업의 상실 등 인간은 부정적인 장래에 대한 '생각'에 취약하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체념하는 마음이 들고, 삶에 우울이 가라앉고,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건 그거고, 삶은 삶이다."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전화할 때면 언제 다시 북한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거라며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아마 기후위기로 인간이 살기 어려워지거나, AI로 직업이 줄어들거나, 언젠가 전쟁이 터지거나 하는 일들도 다 일어날 것이다. 인류가 간신히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건 채 100년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온전한 평화도 아니다. 이미 기후 난민들은 생기기 시작했고, 크고 작은 전쟁도 끝없이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삶은 삶이다. 세상이 비관적으로 흘러간다한들, 세상의 흐름을 개인이 막을 도리는 없다. 결국 개개인은 자기 삶에서, 자기만의 낙관론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냥 자기 갈 길 가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우주의 먼지 같은 인생일진대, 세상에 대한 비관론에 휩싸여 우울해하다가 죽는 건 아쉬운 일이다.
세상일을 걱정하며 투표도 하고, 글도 쓰고, 사회적 실천이나 기부도 할 수 있지만, 그건 그거대로 하고, 또 삶은 삶대로 사는 게 현명하다. 나의 미약함을 인정하고, 세상일을 내가 통달할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10년 뒤 전쟁이 일어날지, 15년 뒤 서울이 물바다가 될지, 20년 뒤 인간 직업이 다 사라질지는 모르는 것이므로, 오늘의 꿈을 꾸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게 맞다고 생각된다.
어제 아내는 어디서 들은 말이라며,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라, 자주 웃는 사람이 이기는 거래."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떻게 되든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많이 웃고 하루하루 속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며 사는 일이다. 나중에는 아마 죽을 것이고, 인류가 간신히 이루고 있는 이 평화 상태도 언젠가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날을 미리 상상하며 우울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삶은 자기만의 낙관론을 가지고 어떻게든 뚫고 나가는 사람들이 '매일 속'에서 이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아이랑 곤충을 잡으러 나가고, 내년에 전쟁이 일어나도 오늘 쓰고 싶은 글을 쓰고, 10년 뒤 서울이 물에 잠겨도 오늘 보드게임 하며 웃고, 20년 뒤 인류 직업이 모두 사라져도 집요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하루하루 열정적으로 살아낸 사람이 이긴 삶을 산 것이다. 어떤 괴로움 속에서도 삶을 결국 긍정해내고야 마는 낙관론의 승자가 되는 것, 이 이야기는 니체를 빌려와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거라고 느낀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날씨의 아이>의 결말은 사뭇 디스토피아적이다. 도쿄는 일종의 기후재앙을 맞이하고, 소년은 그 기후재앙을 막기는 커녕 필사적으로 받아들인다. 즉, 원래라면 소녀를 재물로 바쳐 기후재앙을 막았어야 하지만, 소년이 필사적으로 소녀를 구해낸다. 그로써 도쿄는 물에 잠기고 사실상 멸망한다. 그러나 나는 소년의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도쿄 같은 건 원래 멸망할 것이었다. 소년이 할 일은 필사적으로 소녀를 사랑하고 구해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