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 시대는 자기 서사의 빈곤을 회피하기 위하여, 돈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자기의 삶을 자기만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 실패하면서, '남는 건 돈 뿐이다.' 같은 즉물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다. 지난 10, 20년의 이야기를 쓸 수 없으므로, 그 동안 모은 돈이나 자산 외에 다른 것을 보거나 간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부러운 것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돈을 많이 모은 사람 뿐이다.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 꿈 이야기, 삶을 건 모험 이야기, 여행 이야기, 역경을 이겨낸 성취 이야기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그저 '냉소'해버린 채 '그래서 너 지금 어디 사는데? 강남 자가야?' 같은 식으로 '이야기'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요즘 직장인은 다른 사정은 따지지 않고, 서울 자가 사는 과장님은 부러워하거나 질투하면서, 전세 사는 부장님은 은근히 무시한다고 한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는 능력은 점점 더 무시되거나 간과되고 있다. AI의 발전으로 웬만한 '이야기'는 AI가 다 써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AI에게 '나에 대해 써줘.'라는 식의 프롬프트가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나에 대한 이야기조차 스스로 쓸 수 없어 위탁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나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만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은 확실히 사멸되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자기 삶에 대해 온전한 서사를 그려내는 사람이 드물다. 어디 아파트, 자동차, 직장의 연봉, 폭등하거나 폭락한 주식, 연예인 소식이나 이웃집 사람의 사적인 정보, SNS에서 본 핫플, 요즘 웃긴 예능 프로 같은 가십거리들을 '무한하게' 늘어놓기 바쁘다. 그러나 이 '무한한 늘어놓음'이야말로 '자기 서사 회피'에 가깝다. 자기의 관점으로 꿰어낸 하나의 긴 실타래 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능력이 없으므로, 온갖 눈에 보이는 가십거리들로만 대화를 채울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거의 100년쯤 전에 했던 이야기다. 이후 시대가 쏜살같이 흐르면서, 그가 했던 이야기는 더 심화된 것 같다. 내 삶을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처럼, 자기의 이야기로 꿰어내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대단한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세상이 흔히 결핍이라 속삭이는 것들이 그저 넘어서 흐를 수 있는 가벼운 바위 정도가 된다. 그래서 자기의 서사를 쓰는 사람은 강하다. 자기를 끌어안고 자기의 이야기를 쓰며 나아간다.
특히, 글쓰기 모임을 하다보면, 이 자기 서사의 힘을 느끼게 된다. 모임에서 글쓰기를 시작하여, 5, 6년, 10년 가까이도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나와 함께 모임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나 없이도 모임을 이어나고 있는 분들도 많다. 그분들은 어느 순간, 자기의 이야기 쓰기가 하는 역할에 대해 눈 뜬 게 아닐까 싶다. 저마다 이야기 쓰기 속에서 삶을 살려내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이야기로 교류하며, 이야기로 살아내는 사람들의 연대를 아는 사람들은, 어딘지 달라진다. 그러다 보면, 세상이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이야기로 사는 사람과, 그밖의 온갖 것들로 사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