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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Feb 28. 2018

파산한 사회를 위한 심리학

-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엄기호) 서평

파산한 조울증의 사회


얼마 전 일본의 한 TV 채널에서 한국의 촛불 집회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들과 인터뷰에 나온 시민들은 한국인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감정적인 것 같다’와 같은 말들을 이어 가다가, 나중에는 ‘특권 계급에 대한 질투가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이를 단순히 일본의 혐한 정서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더 정확히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감정 상태를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절제와 순응을 미덕으로 하는 일본의 사회적 정서로는, 극도의 흥분과 집단적 분노가 기이하고 광적인 일로만 보일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얌전하고 무기력한’ 우울증적 상태로 보인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격정적이고 기복이 심한’ 조울증적 상태로 보일 법하다.


얼마든지 가벼운 유흥과 휴식을 즐기면서 삶의 평온을 누릴 수 있는 주말을 반납하며, 매주 100만여 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전국에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도로가 마비되었다거나 언론이 떠들썩하게 다룬다는 것을 넘어서서, 필사적인 ‘삶의 중지中止’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든 감정적 평화 상태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 나가는 데 필사적이라면, 우리들은 절망적인 분노와 함께 무기력한 삶을 끊어 내고 중단시키는 데 필사적이다. 우리는 이 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삶도 함께 리셋reset하고 싶어 한다. 리셋에 대한 욕망이 단지 절망적인 삶의 기분에서 추동되는 것이라면 부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지만, 그것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공적인 분노와 함께한다면 역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정서는 언제나 역사적이고 혁명적이다. 엄기호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에서 이를 ‘삶의 울증’ 가운데 ‘광장의 조증’을 갈망하는 상태라고 정의하는데, 둘 사이의 간극과 기복의 원인으로 현실과 역사에 대한 감각을 이야기한다. 즉, 우리 현대 한국인에게는 ‘역사에 대한 신뢰’가 있다. 우리의 역사는 진보해 왔으며 진보해야 한다는 믿음이 그렇지 않은 현실과 충돌하면서 ‘최악의 조울증’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역사가 퇴보할 리 없으며, 우리 삶 또한 역사와 함께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은 피폐한 사회와 삶 앞에서 배신감으로, 나아가 복수심으로 바뀐다. 엄기호가 말하는 ‘리셋에 대한 욕망 혹은 절망’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역사의 주인으로서, 혁명적인 조증으로 광장에 나섰던 우리의 2016년 하반기와 별개로, 엄기호가 말하는 ‘파산한 세계’로서의 한국 사회는 유효하다. 우리는 이제 서서히 다시 광장에서 물러나 파탄 난 삶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여전히 ‘조증 이후’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이 없으며, 곧이어 광장의 기억이 사라지고 ‘삶의 울증’의 세계가 돌아올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조증 이후이다. 우리는 또 냉소, 우울, 혐오, 증오, 자책, 불안, 후회, 굴욕, 수치가 가득한 우리의 삶을 살아 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정치학이 아닌 심리학이 필요하다. 그것도 단순히 개인적 삶에 갇힌 심리학이 아니라, 이 붕괴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심리학, 사회가 강요하는 마음을 꿰뚫고 벗어나기 위한 심리학, 빛나는 통찰력을 가진 사회학자의 심리학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엄기호를 읽어야 한다.



파산한 사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개인이 파산을 한 경우, 국가는 구제 제도를 통하여 이자를 감면하는 등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방책을 마련해 준다. 그러나 사회가 파산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 사회가 총체적으로 출구 없는 내리막길을 향해 가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저출산·고령화, 청년 실업, 노년 빈곤, 양극화 등의 경제적 문제를 비롯하여, 정경 유착, 정치 혐오, 극단주의 등 정치적 문제, 그 외에도 종교적 근본주의, 경쟁적 능력지상주의,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등 문화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고 해결책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한국 사회는 파산 직전으로 내몰려 있다. 엄기호의 표현대로라면, 이런 사회에 남은 것은 ‘병리학’밖에 없다.


그는 파산한 사회에 대한 대처가 크게 네 가지를 이룬다고 본다. 첫째는, 냉소다. 냉소는 자기 방어의 일종으로, 공동 세계를 지으려는 사회의 의지 자체를 파괴한다. 냉소하는 이들은 협력을 위한 모든 제안을 거부하면서 자기 안으로 파고든다. 둘째는, 유예다. 유예는 우리의 삶과 사회가 이미 파산했다는 사실을 거부한 채, 끊임없이 공부 중독에 빠져드는 태도다. 공부 중독자들은 현실에 대한 직시를 거부하면서, 공부를 위한 공부에 몰두한다. 셋째는, 도피다. 도피는 큰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그 안에 파고드는 것이다. 코제브Alexander Kojeve가 말한 식물에 가까운 이들은 자기 라이프스타일에만 몰두하며 실제 사회에 대한 인식을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리셋을 꼽는다. 리셋은 앞의 세 경우와 다르게 실제 사회에 대한 방어라기보다는 공격에 가깝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리셋을 갈망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 내에서 듀이가 말한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 즉 경험의 연속성을 통해 삶을 기획하며 자아 동일성을 얻는 일이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희망 없는 사회에서 이 세계 자체의 붕괴를 갈망한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냉소주의자들과 유사할 수 있지만, 종말론에 경도되고 타자에 대한 증오와 혐오에 앞장선다는 점에서 더 적극적이고 참여적이다. 이 리셋을 향한 욕망이 가장 문제적인 이유는 그 어떤 병리적 태도보다 파괴적이고, 정념적이고, 허무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병리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도 지적된 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명제 아래 스스로를 소진시키며 우울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 시대는 사람들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불안과 후회의 사이클에 갇혀 공황에 이르게 만든다. 또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비장하다’고 여기는 특수한 나르시시스트까지 출몰하며 약자에 대한 원한에 몰두한다. 그 가운데 사라지는 것은 희망할 수 있는 능력과 배울 수 있는 용기이다. 엄기호는 이들을 괴물이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러한 괴물을 만든 이 사회의 무능에 대해 더 큰 비판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엄기호가 진단한 이 사회의 ‘병자들’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조율하며 악착같이 버티고 있을 때, 그가 말한 이 모든 병자들이 우리 안을 지나쳐 간다. 우리는 가까스로 괴물이 되지 않았을 수 있지만, 이 모든 병들의 보균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자기 성찰이 부족하거나 충분히 현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생존하고 있는 한 필연적인 일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더욱 빨리 병들어 가거나 덜 병든 채로 겨우겨우 버티는 것밖에 없어 보인다. 



국가와 사회, 공도동망의 연합 전선


근대 국가는 구성원들의 삶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보장해 주며 정당성을 획득해 왔다. 국가가 공교육을 책임지며 각자의 일을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만들고, 국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구성원의 안전을 담당하며, 노년에 이르러서도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지 않게끔 생계를 보장해 주는 과정이 근대 국가의 발전 모습이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이를 위해, 근대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면서 공정한 법을 통해 구성원을 통치한다.


엄기호는 이러한 근대 국가의 역할이 대한민국에서는 사멸 직전에 이르렀다고 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 가습기 살균제 문제 등에서부터 강남역 살인 사건과 구의역 사망 사건 등까지 우리의 국가는 크고 작은 문제에서 완전한 무능을 보여 주었다. 사실상 국민들은 야생 속에서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각자도생’의 삶을 살고 있다. 최근의 국정 농단 사태까지 더한다면, 우리의 정부 혹은 국가의 통치에서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사회를 해체하는 국가’에 의해 필연이 아닌 우연으로 회귀했다는 것이 엄기호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떨까? 사회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 국가 내의 여러 주체들이 공동으로 구성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문화적인 연결망의 총체로 사회를 정의한다면, 우리 사회 역시 파산했다는 진단을 피해 갈 수 없다. 엄기호는 우리 사회가 ‘새로운 신분제 사회’로 진화되어 감을 지적하는데, 그 바탕에는 ‘자본’이 있으며, 이 자본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모욕을 주는 사회가 우리의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한 명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한 존엄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위계의 피라미드 안에서 서로 모욕을 주고 굴욕을 견디며 생존하는 것만이 남았다고 말한다.


구성원의 삶을 관장하는 제도는 물질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에서도 우리 삶의 근간이 된다.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특수한 방식에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미래를 기획하고, 관계의 기준을 세우고, 자아 정체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 제도에 의지했을 때, 우리가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이 ‘어떻게 굴욕을 피하며 다른 누군가에게 굴욕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라면, 그 제도 혹은 사회는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까? 엄기호는 그 결과 남게 된 것이 ‘특수한 집단주의’라고 말한다. 제도도, 사회도, 국가도 아닌 사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별 집단에 의지하며 차별과 모욕, 증오와 복수심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진단은 이미 신기루가 되어 버린 우리 사회의 ‘사회 없음’을 적중하고 있다. 이것은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이 작동한 결과라기보다는, 어떠한 상상력도 불가능해진 우리 사회에 대한 처절한 인정에 가깝다. 그는 이런 상태를 ‘공도동망共倒同亡’이라고 부르며, ‘공적인 것’이 사멸한 사회라 말하고 있다.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2016년 하반기를 지나 보냈다. 광장을 향한 열정은 더 이상 국가라고도 부를 수 없는 국가에 대한 공적인 분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불가능해진 삶으로부터 온 절망이기도 했다. 주말이면 촛불을 켜고 곁에 있는 동료 시민들과 손을 붙잡으며 불가능해진 삶을 복원해 달라고, 퇴보해 버린 역사를 되돌려 놓으라고,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제도를 다시 일으켜 달라고 절규했다. 그로 인해 보수당은 분열하고, 탄핵 절차가 이어지고, 국정 조사와 특검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조증’이 이루어 낸 성과였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는 이 조울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또한 알고 있다. 사회가 재건되지 않는 한, 조증과 울증의 무한한 반복이 우리 삶을 내내 따라다닐 것임을 알고 있다.



파산한 사회, 그 이후  


우리 사회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졸저 《분노사회》를 비롯하여, 여러 강연에서 나 역시 꾸준히 말해 왔다. 우리 사회를 더 이상 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사회 없는 사회’야말로 우리 사회라는 진단 또한 (비록 실제로 만나서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엄기호와 전적으로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사회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가장 주된 관심사이자 궁금증이었고, 통찰력 있는 사회학자의 대안을 듣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병리학’밖에 없다고 할 때는, 필연적으로 그 병을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게 된다.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개인적인 질병에 관해서는 우리 시대에 아주 풍성한 치유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서양 의학을 필두로, 한의학 또한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고, 다양한 민간요법들 역시 유효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인 질병, 다시 말해 그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떨쳐 낼 수 없는 고유의 질병 덩어리들을 씻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양 의학에 따르면, 질병은 제거하면 된다. 바이러스든 암 덩어리든 병을 만들어 내는 부분들을 솎아 내어 없애 버리면, 우리 신체는 정상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우리 사회의 특정 부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들어 버린 ‘사회’를 솎아 내어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의학 혹은 민간요법의 방법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한의학에 대해서 상술할 수 있는 지식은 없지만, 기본적으로 한의학은 ‘특정 대상의 제거’라는 서양 의학의 방법론과는 그 토대를 달리한다. 한의학에서 신체의 병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 전체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우리 내부의 각기 다른 부분들과의 상호 작용이 어긋났을 때 발생한다. 따라서 관건은 어떻게 우리 신체 내부의 관계들을 복원할 것인가이며, 그를 통해 나아가 어떻게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이다.


우리의 몸과 삼투 관계를 이루는 ‘세계’를 ‘사회’로 치환한다면,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회학적 치유 방법이 제시될 수 있다. 리셋을 비롯한, 정치 세력을 바꾸고 경제 제도를 개혁하여 문제를 한 번에 바꿀 수 있다는 환상은 한의학보다는 서양 의학적인 것이다. 때로는 치명적인 암세포를 제거하는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 내 몸 전체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엄기호는 이종영의 논의를 빌려 ‘혁명 이후의 혁명’, 즉 혁명 이후의 삶을 선취하는 것에 대해 역설한다. 이를 한의학적으로 말한다면 병을 회복하고 조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조화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워지기 전부터 우선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병을 만든 근원을 파헤쳐서 끄집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병을 끌어안은 채 병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사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에 의해 찢어지고 파열된 우리 내부의 괴물성을 인정한 채, 그 괴물성이 발휘되지 않도록 막으면서, 괴물이 아닌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말의 힘’이다. 앎의 힘이고, 배움의 힘이고, 교육의 힘이다. ‘큰 사회’ 어디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지만, 엄기호가 일찍이 말했던 우리의 ‘곁’으로 시선을 돌린다면 거기에는 나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 전체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가 있다. 곁에 있는 이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을 건네며 우리는 ‘조증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언뜻 보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삶을 필사적으로 선취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 <오늘의 교육> 36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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