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이 모든 것들이 농담 같은 거라고, 누군가가 말해주길 간절하게 바랄 때가 있다.
지금 재이가 그랬다. 모든 게 가짜였다고, 네가 속은 거니 하하 웃고 넘기라는 말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았다.
예순 살이 족히 넘을 것 같은 반백의 영감이 재이 맞은편에 앉아 있다. 토요일 오전 열한 시, 사상 터미널 앞에서 만나 적당한 카페를 고른 것이 엔제리너스였다. 영감은 카페에서 메뉴를 골라 주문하는 것부터가 어색했다.
“레몬즙? 아니지, 레몬레이더 한 잔과, 음, 한 선생은 뭘 한다 했지? 아메리카논지 뭔지 따순 거 하나 주시오.”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카드를 긁으며 둘을 힐끔 쳐다봤다. ‘두 사람 무슨 관계지?’ 하는 것 같았다. 재이는 조금 민망해져 서둘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재이는.
레몬레이더와 아메리카노를 사이에 두고, 예순 살이 족히 넘는 반백의 영감이 스물여섯 재이에게 묘한 시선을 던진다. 묘한 말도 서슴지 않게 던진다.
“한 선생, 참 예쁘군. 근래 보기 힘든 아름다움일세.”
상대가 무안해하는 걸 못 견디는 재이였다. 자신의 몸을 훑는 영감의 시선에 불편한 내색 하나 하지 못하고 겨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 재이는 자꾸만 2층 계단 입구에 시선이 갔다. ‘이제 올 시간이 되었을 텐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재이는 영감이 데려올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2층으로 들어서는 남자들은 죄다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얼굴 모르는 상대니 누구일까 짐작할 수조차 없어 괴로웠다. 영감에게 물어볼 용기는 차마 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이 탔다. 하릴없이 들이킨 따순 아메리카노는 비워진 지 오래였다. 영감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움 타령, 사랑 타령을 하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만 뱉어냈다. 자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와 준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달뜬 표정으로 이성적 어필을 하고 있는 영감. 그 동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제야 재이는 상황 파악이 되었다. ‘이 영감탱이, 소개팅을 주선하러 나온 게 아니구나. 내가 단단히 오해했다. 시발, 망했다!’ 이 순간을 위해 마스크 팩을 했던 어젯밤이, 늦잠을 포기한 주말 오전이, 가장 아끼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던 오늘 아침이, 설렘을 가지고 몸을 실었던 사상 행 전철에서의 시간이 수치스러워졌다. 언젠가 통화에서 들었던, ‘한 선생이 맏딸이라 부모님이 거는 기대가 많겠다. 좋은 남편감을 찾아야겠구먼.’ 하는 영감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영감은 본인이 재이와 이어지기 힘든 현실에 혼자 슬퍼했던 것이다. 애초에 재이를 다른 남자와 이어 줄 생각은 없었다.
재이는 친절했던 죄 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난여름, 국어과 연수를 듣는 자리에서 영감을 처음 만났다. 연수가 며칠 진행된 셋째 날, 김해에서 창원 연수원으로 가는 시외버스에서 우연히 만나게 돼 인사를 나눴고, 아빠 뻘 되는 선배에게 예의를 갖추려 몇 마디 대답을 웃으며 했을 뿐이었다. 대화가 원활히 이어지자 영감은 함께 있던 자신의 친구를 굳이 먼저 보내고 재이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닷새간의 연수가 끝난 뒤, 재이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한 선생, 날세. 내가 한 선생을 좋게 보는 것만으로는 아까워서. 그래, 부모님은 양측 다 건강하시고? 어떤 남자를 좋아하나? 주말에 시간 한 번 내주겠나? 카페에서 보는 걸로 하지.”
재이는 영감의 학교에 있는 괜찮은 남교사를 본인에게 소개해주는 자리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게 상식적인 전개라 생각했다.
“제가 곧 약속이 있어서요.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아니, 벌써?”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했어요. 커피 감사히 마셨습니다.”
“아, 나는 한 선생이랑 저기 경주 불국사에 가려고 했었는데. 시외버스 타고 말이야.”
“제가요? 선생님이랑 불국사를요? 괜찮아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쉽구려. 그럼 버스 타는 데까지 함께 가도록 하지.”
이제 잠시도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 재이는 정류장에 다다라 가장 먼저 오는 버스에 올라타버렸다. 함께 불국사를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영감의 눈빛이 뒤통수에서 느껴졌다. 그 시선을 차마 볼 수 없을 것 같아 버스를 타서도 앞만 보았다.
때로는 이 상황이 모두 농담 같은 거라고 누군가가 말해주길 간절하게 바랄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진짜였다. 앞으로 영감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더 할지에 대해서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재이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버스 안에서 흐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