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이프>
<원더풀 라이프>
1998
고레에다 히로카즈
*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오랜만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영화는 세 번쯤 도전했다가 성공한 영화입니다. 첫 번째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GV 상영에 들어갔을 때입니다. 며칠 동안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에 영화 네 편을 본 피로가 쌓여, 영화의 따스함을 안고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눈을 뜨니 감독님이 무대에 계셨습니다. 영화처럼 아름다운 질문과 답변이 오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에도 넷플릭스로 몇 차례 도전을 했다 번번이 잠들었습니다. 이번에 완주를 했던 건, 친구와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했던 덕분이네요.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각자의 이야기가 분리되어 있고, 복잡한 플롯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겸손한 영화입니다. 이미 유명한 비하인드인, 아마추어 배우들과의 작업이라는 점도 그렇고요, 서사를 끌어가는 데에 억지로 힘을 주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반반 섞어 놓은 영화였습니다.
인물 위주로 사건이 진행됩니다. 시오리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18세의 여자아이고 죽은 지는 1년 정도 되었습니다. 배우의 마스크 때문인지 영화의 톤 때문인지, 시오리의 성격은 조금 의외인 데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을 신나게 묘사하고 그 기억을 선택하는데, 그 아이의 기억이 흔하다며 평가절하합니다. 결국 아이는 다른 편안한 기억을 선택합니다. 시오리는 아직도 열등감을 벗지 못했고, 질투하고 시샘합니다. 또 함께 일하는 타카시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의 정서가 그렇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평온하고 잔잔한데 반해 시오리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뾰족한 대나무가 우뚝우뚝 솟아 있습니다. 삶에 가장 가까운 시오리에게만 우리가 부정적이라 평가하는 모난 마음들이 남아있다는 점은 ‘욕망’을 재평가하게 만듭니다. 욕망은 살아있다는 가장 큰 정서적 증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독님은 그걸 긍정하고자, 아니 적어도 다르게 한 번 보자는 시선을 던져준 것 같습니다.
시오리가 좋아하는 타카시라는 인물은 22세에 죽어서 외모는 아직 젊지만 살아있었다면 70세가 넘는 노인입니다. 타카시는 50년 동안 아무 선택도 못한 상태로 지냈습니다. 타카시와 비슷한 나이의 한 남자가 들어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담긴 71개의 테이프를 돌려보고는 한 기억을 선택합니다. 영화관 옆의 공원에서 아내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시절의 기억입니다. 그의 아내는 타카시의 정혼자이기도 했지요. 남편은 타카시에게 편지를 남깁니다. 아내는 매년 정혼자의 기일마다 혼자 묘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죽어서도 타카시와의 기억을 선택했습니다. 세 명이 같은 공원의 같은 벤치를 선택합니다. 71세의 남자가 있었던 그날의 벤치는 뜨뜨미지근 했던 결혼 생활 중, 그나마 행복하게 보낸 아내와의 시간입니다. 그보다 먼저 이 곳에 왔던 아내에게 그날의 벤치는 젊은 시절, 정혼자를 전쟁터에 떠나보내는, 어색하고도 마음 아픈 시간입니다. 그리고 둘의 결혼 생활에 어찌저찌 끼어 버린 그남자의 벤치는, 자기와의 기억을 영원히 갖고 가기로 한 여자의 선택을 알고서 선택한, 혼자만의 벤치입니다.
저는 이 셋의 이야기에서 박완서 작가의 ‘그여자네 집’이 떠올랐습니다. 동네의 공식 커플에게 닥친 비극 이후에, 여자는 죽었는지, 다른 데로 잡혀갔는지 행방을 모릅니다. 남자는 동네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아내는 평생을 곱단이의 유령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이 영화의 남편도 평생을 그렇게 지냈을 겁니다. 죽일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는 존재와 함께 지냈어야만 했을 겁니다. 둘의 결혼생활 어귀에는 항상 타카시의 유령이 움직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알게 된 이후에야 ‘선택’을 할 수 있던 타카시의 행동은 선택이라기 보다는 책임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책임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인물에게서도 나옵니다. 타카시처럼 젊은 나이에 죽은 이세야가 있습니다. 타카시는 50년간 미루어왔던 선택을 함으로써 책임을 지는데 반해, 이세야는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을 지겠다고 말합니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취사 선택하여 그 속에서만 영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임에도, (그리고 영화에서도 누군가는 그곳이 천국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는 끝까지 선택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억을 부정하는 이야기도 합니다. 삶이 끝나고 영원한 시간의 연장일 뿐인 그곳에서 그는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지 않은 일과 꿈이라는 무의식을 선택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나의 기억만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자기의 모든 기억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자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경험과 기억 또한 하나의 꿈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개인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작품입니다. 가장 행복했던 한 기억을 최대한 똑같이 재현해주겠다는 영화의 약속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월, 화, 수요일 내내 생각해도 절대 하나만은 고를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똑같은 영화가 억겁의 시간동안 상영되는 영화관은, 누군가에게는 모든 고통을 잊을 천국이라면, 누군가에게는 다른 모든 행복한 기억은 잊어야만 하는 슬픔의 공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