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걸친 악사

5악장

by Bloom지연

― Allegro agitato

(알레그로 아지타토: 빠르고 격정적으로)

숨 가쁘게 몰아치는 리듬 속에,

불안과 긴장, 감정의 격류가 쏟아지는 악장.

음악은 설명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

숨을 몰아쉬듯 달려갑니다.


그 눈빛과 정확히 마주친 순간,

무언가가 나를 휘감고 지나갔다.

그가 다가올수록,

선율이 이상하게 비틀렸다.


첼로는 줄을 스스로 감더니 침묵했고,

플루트는 단 하나의 음만 길게 늘였다.

마치 숨을 참는 듯,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나는 밤비를 향해 외쳤다.


“밤비, 저 문… 저 문은 뭐야…?”


그때서야 보였다.

음악의 선율이 휘어지던 그 지점에,

희미한 윤곽의 문 같은 형체가 서 있었다.


“밤비, 저기로 가지 마! 그 문, 위험해 보여.”


그러나 밤비는 내 말을 들은 듯 만 듯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그 문은 어느새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검은 망토가 스치고 간 듯한

어둠의 흔적뿐이었다.




“있잖아…”

밤비가 처음으로 속삭였다.


“나는… 그를 알 것 같아.

그 그림자, 오래전부터 음악 속에 숨어 있었어.”


나는 밤비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 작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피아노가 홀로 울기 시작했다.

누가 친 것도 아닌데,

낮고 조용하게.

그런데도 너무 또렷했다.


그건 분명,

누군가의 말 없는 경고였다.


피아노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건반을 누르는 손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음표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질서 있게, 한 음씩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악기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첼로는 활을 거두었고,

오보에는 날숨을 마치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심벌즈는 조용히 덜덜 떨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부딪히지 않았다.

공기 속엔, 마치 모두가 숨을 참고 있는 듯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이 공간을 꿰뚫으며 흐르는,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밤비…”

나는 작게 불렀다.


그 아이는 내 손을 꽉 잡은 채,

거의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했다.

“그건… 누가 연주하지 않아도

음악 속에 있는 것 같아.

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사람…이라는 거야?”


밤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아니, 이제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어둠을 입은 누군가야. 악사처럼 보여.”


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림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뒤에서 선율 하나가 천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연주한 것도 아닌데,

그는 확실히

음악 속에서, 우리를 듣고 있었다.


피아노의 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말을 끝낸 사람처럼.


순간, 궁전의 벽면에서

오선 하나가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그 아래 붙어 있던 음표들이,

툭툭 바닥에 떨어졌다.

악기들이 머물던 방 안에서

음악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소리가 빠져나간 자리엔 먼지와 침묵만이 남았다.


“왜… 왜 이러지?”

나는 얼어붙은 채 앞을 바라봤다.


검은 그림자의 등 뒤로,

오래된 바이올린 하나가 조용히 걸쳐져 있었다.

그림자는 악기 위에 낮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더는 활을 들 필요조차 없다는 듯,

무겁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인 건 악기가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오래된 기억이었다.


“저 바이올린… 그 검은 그림자가 켰던 거야.”

밤비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떨렸다.


나는 밤비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이야…?”


밤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여기… 처음엔 나도 궁전인 줄 알았어.

근데…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그런 느낌.”




밤비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금빛 먼지가 쌓인 낡은 악보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 안엔 내가 읽지 못하는

기묘한 기호들과 찢긴 선율이 휘갈겨져 있었다.


“이 악보… 낯설지 않아.

누구도 듣지 못하게, 혼자 썼던 것 같아.

마지막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밤비가 말했다.


나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

“너, 이걸 본 적이 있어?”


밤비는 대답하지 않고, 악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일기를 꺼내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여기… 왠지 익숙해.

아주 오래전…

나도 이 안에 있었던 것 같아. “

밤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날 음악이 끊겼어.

이유는 몰라.

그냥 모든 게 멎어버린 날이었어.

그때 저 그림자도 지나갔던 것 같아. “


나는 숨을 멈추고 밤비를 바라보았다.

“그게… 언제였는데?”


밤비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잘 몰라.

기억이 아니라…

그냥… 몸이 기억하는 느낌이야.”


나는 생각에 잠긴 듯한 밤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벽에 금이 가고,

침묵한 악기들이 하나둘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순간—

공기 속에서

낯선 멜로디 하나가 흘렀다.


그건 마치,

“너도 연주할 수 있니?”

하고 묻는 질문 같았다.


밤비는 내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말했다.


“그는 말 대신 음악으로 말하는 것 같아.

우리한테 뭔가를 원하고 있어… 아마도.”


나는 작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 방에 남으려면,

그에게—

나만의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안에 숨은 소리를 찾으려 애썼지만,

고요만 가득했다.

입술이 떨렸다.

“나…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어."


그 순간, 벽의 오선 하나가 완전히 무너졌다.

금빛 줄이 뚝 끊어졌고,

그 틈으로 검은 안개가 밀려들었다.


궁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밤비…!”

나는 밤비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 아이는 어느새 내 손을 놓고

그림자 쪽으로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안 돼! 거기 가지 마!”


“괜찮아.”

밤비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이 소리 안에 있었어.

아득한 시간 너머부터. “


그림자가 밤비를 향해 손을 들었다.

악사의 실루엣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검은 망토 자락 아래—

무언가를 연주하는 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안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처음으로, 내 안에서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소리 하나가 피어났다.


그 순간 밤비가 돌아섰다.

미소였는지 눈물이었는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지금… 시작된 거야.”




그때,

모든 빛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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