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들의 방으로 들어가다

4악장

by Bloom지연

― Andante misterioso

(안단테 미스테리오소: 조용히, 신비롭게)

조용히 걷는 듯한 느린 리듬 속에,

무엇인지 모를 신비와 긴장을 머금은 악장.


커다란 궁전문은 눈앞에 산처럼 솟아 있었다.

빛나는 오선지들이 문 위를 흐르듯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 대신 금빛 활 모양의 장식이

양쪽에 비틀어져 있었다.


문 주위 벽면엔 각기 다른 악기의 실루엣이

얇은 선으로 조각되어 있었고,

가끔은 벽 사이사이에서

미세한 선율의 잔향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진짜 안 열려… 왜 이렇게 무겁지?

밤비야, 너도 힘을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


“오케이! 하나, 둘, 셋… 힘줘! “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인형이, 지금… 말을 했다?


“밤비… 너 지금… 말했어?”


밤비는 아주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응. 나 원래 말할 줄 알아.”


그리고는 작고 따뜻하던 손을,

내 손에서 스르르 빼냈다.

그리곤 폴짝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근데 네 방에서는,

네가 조용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가만있었지 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문이 막혔다.


밤비는 이제 더 이상 팔에 안겨 있지 않았다.

대신 깡충깡충 발을 구르더니,

깔깔 웃으며 제 발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여긴 네 방이 아니잖아. 여긴 음악의 세계니까!”


그리고는 웃기다는 듯,

때굴때굴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우리는 잠깐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가,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갔다.

힘껏 밀어보았지만,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열쇠 구멍도 없고…

버튼이라도 어디에 숨어 있는 건가?”


발밑 바닥은 마치 피아노 건반처럼 색이 흘렀고,

가끔 내가 움직일 때마다

발밑에서 은은한 음이 났다.


나는 문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문득 밤비를 보고 소리쳤다.


“밤비야, 너 또 어디 가!

너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나도 찾고 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넌 작아서 잘 안 보여. 그냥 여기 있어.

문 열려면 커다란 버튼이나

문고리 같은 걸 찾아야 한다고.

이런 큰 궁전에 넌 너무 작아서 못 찾을 거야. “


밤비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두 팔을 벌리며 투덜대는 얼굴로

깡충깡충 문 옆 기둥 아래로 갔다.

나는 불안해서 계속 그쪽을 쳐다봤다.

기둥 꼭대기에 작은 종 같은 것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밤비가 뒤돌아 보며 외쳤다.


“어? 루치아! 이거 봐봐! 저기 저 끝에…

조그만 거… 저거, 어디서 본 거 같지 않아?”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벽 모서리, 음악문자의 끝자락처럼 휘감긴 곳에

종 같은 것 사이, 조개처럼 생긴

아주 작은 물건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뭐? 그 조그만 거?

지금 무슨 장난감 같은 걸 찾는 게 아냐.

하… 그리고 너만큼 쪼끄매서 뭐가 뭔지도 안 보여.”


밤비는 작은 다리를 모으고 바닥에 깡충 서더니

조개껍데기처럼 반짝이는 그것을 톡톡 두드렸다.


“이거 너 어릴 때 잘 갖고 놀던 거잖아.

유치원 다닐 땐 맨날 이거 들고 딱딱 치고…

근데 엘리멘트리 스쿨 들어가고 나선

상자에 처박아두더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섰다.


“… 잠깐, 이거… 캐스터네츠?”


밤비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딱, 딱— 소리를 냈다.


순간, 문 중앙에 푸른빛 음표 문양이 떠올랐고,

금빛 활 장식이 서서히 풀리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이걸로? 이 조그만 게… 문을 연다고?”


궁전문은 마침내 소리 없이,

빛과 음악을 머금고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밤비는 신이 나서 문이 열리자마자

깡충깡충 뛰어들었다.

“우와! 여긴 뭐야! 악기 천국이야?”


나는 긴장한 채로 밤비의 손목을 잡았다.

“쉿, 조용히 좀…

우리, 너무 소란스럽게 들어온 거 아닐까?”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실내는 고요했지만 어딘가 낯선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다 문 옆 벽에 붙어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장식인 줄 알았던 그것이,

금속성 광택을 내며 몸을 떼어내더니

우리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서 오게, 작은 손님들.”


깊고 둥근 목소리.

그것은 거대한 황금빛 심벌즈였다.

양쪽 팔을 휘익 펼치며 반짝이는 곡선을 자랑했다.


둥글고 납작한 두 개의 원이, 서로 맞닿기도 전인데,

그 둘 사이에서 바람이 스치는 듯한 긴장감이 번졌다.


“우린, 단순한 금속이 아니야.”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원판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그러고는 한쪽이 살짝 위로 비켜 올라간 채

느리게, 마치 무대 위 무희처럼 회전하며

울림을 퍼뜨렸다.


“심벌즈. 이 이름을 잊지 마.”

황금빛 둥근 악기가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악기 자체가 울리는 몸울림 악기,

아이디오폰(Idiophone).

단단한 공기 사이로 플램(Flam) 연주를 할 땐,

한 번의 동작으로 두 번의 울림을 선사하지.”


나는 무심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 울림은 사방의 공기를 흔들고,

머릿속까지 전율처럼 퍼져 나왔다.


심벌즈가 가볍게 돌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우릴 그냥 세게 친다고

좋은 소리가 나는 게 아니야.

적절한 ‘각도’, ‘타이밍’, ‘그리고 예열’.

우릴 울리기 전엔, 가볍게 살짝, 예열해야 해.

무진동 상태에서 큰 충격은

오히려 우리를 침묵시킬 수 있으니까.”


그러곤 유려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울림은 정확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곡이라도

단순한 소음으로 전락하지.”


그때였다.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누군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길고 우아한 몸체.

긴 활을 어깨 위에 걸치고,

한 손엔 검게 닳은 그립을 쥔 채.


“첼로…"내가 속삭였다.


그는 천천히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울림, 너… 어디서 들어본 적 있지 않니?”

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곡,

‘가장 위대한 첼로 협주곡 중 하나’라고 했던 그 곡.

“이 곡… 나, 들어본 적 있어.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첼로 협주곡인데…”


그때 첼로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너희 할아버지, 꽤 감식하시네?

슈만의 첼로 협주곡 a단조, Op.129.”

첼로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이 곡에서, 나만의 숨겨진 맥박을 찾아냈어.

긴 선율 속에서도 나만의 고동이 흐르고 있어야 하지.

그게, 내가 음악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이유야."


그의 몸이 흔들릴 때,

마치 등껍질의 금 가는 소리처럼

은은한 크랙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마저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소리를 내며, 연주를 시작했다.


"길고 유려한 선율 안에서도

나만의 숨결을 유지하는 것,

그게 첼로의 자존심이지.”


밤비는 첼로 앞에서 손뼉을 쳤다.

“우와! 나도 나만의 맥박을 갖고 싶어!”


첼로는 밤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생각만으로도 넌,

음악의 세계에 초대될 자격이 충분하단다.”


그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반짝이는 은빛 선율이

빙글빙글 내려오더니,

구불구불한 파이프 모양의 작은 몸이

뱀처럼 휘감기며 허공에 나타났다.


“누구 맘대로 초대를 남발하나? 기준은 있어야지.”


까칠한 목소리였다.

오보에였다.

길고 가느다란 몸에,

눈썹이라도 있는 듯 표정이 뚜렷했다.


플루트가 허공을 떠다니다가 내려오며

경쾌하게 웃었다.


“또 시작이네, 오보에.

어차피 음악은 규칙보다 감정이 먼저야.”


“감정도 품격이 있어야 해.

그게 우리 목관악기의 철학이지.”


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논쟁은 잠시 멈추고,

우리 친구들에게 음악 궁전의 다음 방을

열어주지 않겠니?”




그렇게 말하자, 뒤쪽 커다란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 너머에는 기다란 식탁이 놓인 연회장이 나타났다. 촛불 대신 샹들리에가 천장에 매달려 반짝이고,

크리스털 잔들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와아, 이게 다 우리를 위한 거야?”


밤비는 두 귀를 활짝 열고 신이 나서 달려갔다.


나는 웃으며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나도 엄청 배고파.”


식탁에는 벌써 음식이 세팅돼 있었다.

따끈한 수프, 작게 자른 치즈와 과일,

그리고 악기 모양의 빵까지.


밤비가 의자에 앉으려던 그때,

나는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어… 밤비야, 저기 봐.”


식탁의 맞은편, 가장 먼 자리에

누군가를 위한 자리가 하나 더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도 앉지 않았지만,

수저와 접시, 잔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누구지? 우리 말고 또 용감한 친구가 온 걸까?”




그 일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궁전 식당의 끝, 창문도 없는 저편에서

기이하게 뒤틀린 바이올린 선율이 울려왔다.


귀를 찢는 듯 날카롭고,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검은 망토를 길게 드리운 한 존재가 서 있었다.

얼굴은 어둠에 잠긴 채 흐릿했고,

그 실루엣은 마치 내 방 벽에서 진득하게 흘러내리던

검은 진흙 덩어리 같았다.


밤비는 움찔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악마의 얼굴을 한 듯한 그 존재가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존재가 손끝을 들자,

바이올린 활이 공중에서 허공을 가르며 떠올랐다.

누가 붙잡고 있는지도 모를 그 활은,

허공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며

끊어진 듯 이어지는 음들을 긁어냈다.


쉿—

첼로가 숨을 삼켰다.

플루트는 천장의 금빛 장식 속으로 살짝 몸을 숨겼고,

심벌즈는 아까의 호기로움을 잃은 채

자신의 패드를 꼭 끌어안았다.


“무슨… 소리야?”

밤비가 내 팔에 바싹 붙어 속삭였다.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데,

왜 음악이 들리지?”


그때,

식탁 끝에 놓여 있던 접시 하나가

갑자기 ‘챙—’ 하고 울렸다.

그 여운이 퍼지며

바닥에 깔려 있던 융단의 색까지 변하는 듯했다.


“움직이지 마.”

어디선가,

오보에의 얇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자는, 어둠의 선율로 문을 여는 자야.

불러서는 안 될 존재지.”


그리고 첼로가 낮고 굵은 울림으로 말을 이었다.

“악보에도 없는 음을 연주하는 자.

자신의 영혼을 팽개치고

악기의 혼으로 존재하는 자.”




나는 목이 말라왔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 음, 그 바이올린 선율이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어딘가에서 들었던 소리 같다는 점이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나만의 환청인지조차 알 수 없는

섬뜩하도록 낯익은 소리.




그리고

그 검은 존재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검은 망토 끝자락이 공기처럼 일렁였고,

빛이 닿을수록 더 짙게 스며드는 그림자처럼

그 자는 형체를 감추며 다가왔다.


피부가 아니라,

진흙 같은 그림자와 빛이 얽힌

금속성의 실루엣.

눈은 보이지 않는데,

그의 눈빛이 나를 꿰뚫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언제였을까.

어디서 들었을까.

이 불협과 긴장의 선율,

꿈결처럼 들려오던 이 소리.


… 그래.

그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들려주던 그 음이었다.


“이 곡은 말이야,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인간 같지 않아.

듣고 있으면—

어디선가 날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단다.”


그때는 웃으며 넘겼던 말.


지금,

그 말이

나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의 눈빛과

나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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