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환상

6악장

by Bloom지연

— Largo espressivo

(라르고 에스프레시보:

느리고 장엄하게, 감정을 깊이 담아서)

천천히, 하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듯

하나의 선율이 어둠을 가르며 번진다.

두려움과 용기, 그 사이의 떨림.

소리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기억은 침묵의 틈에서 다시 깨어난다.


“밤비?”


나는 조심스레 불러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었는데,

어디 간 거지?


“장난치는 거지… 그렇지?”


주위를 둘러봤다.

불 꺼진 방 안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시간조차 멈춘 듯,

어떤 소리도 허락되지 않았다.


가슴이 콕, 내려앉았다.

아니야, 놀랄 필요 없어.

밤비는… 아까 무슨 말했었지?


‘이제 곧 시작이야.’

맞아, 그 말. 그리고…


“악보…!”




그 순간,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장면.

밤비가 떠나기 직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쥐고 있던 종이 한 장.


’이거야… 이게 시작이었던 거야.‘


공기 전체가 멎은 듯,

바람 한 점 없이 물속처럼 정지돼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천천히 내쉬었다.

침착해야 해.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둠 속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뭔가 바스락하고 걸렸다.

’어… 이거…‘

조심스레 들어보니,

황금빛 종이였다.

맞아, 이거…

밤비가 봤던 거야. 악보.


나는 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무섭다…

하지만 무서워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무서웠지만…


할아버지, 제발요.

나한테 용기를 주세요.

어렸을 때 했던 것처럼요.

기억나죠?


우리 같이 부르던 그 노래.


나는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이상하게,

어둠인데도 오선지 위 음표들이 보였다.

반짝반짝… 꼭, 작은 별 같았다.


‘ 왜 이게… 이렇게 눈에 잘 보이지? 어두운데…‘

내 심장이 콩콩, 소리를 내며 뛰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살짝 열었다.

“음… 으으음…”

너무 작아서 내 목소리인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분명히 소리가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저쪽 어둠 속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은은히 퍼졌다.




’ 어? 뭐지? 내 소리에 반응한 거야?‘


처음엔 그 소리가 너무 날카롭고, 무서웠다.

귀를 찌르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마치 나랑 같이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짜로.


나는 숨을 다시 고르고,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길게 소리를 냈다.

목구멍이 마르고, 다리는 떨렸지만…

괜찮아.

나도 할 수 있어.


나는 허밍을 이어갔다.

바이올린 소리도 그에 맞춰 따라왔다.

두 개의 소리가 하나가 되어, 어느새

진짜 노래가 된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음악 안으로 들어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조금… 안심됐다.


나는 악보 위의 음표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황금빛 종이 위의 검은 음표들은

어렴풋이 빛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음표들은

점점 또렷해졌다.

방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

이 멜로디…”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종이를 살며시 더 펼쳤다.

떨리는 손끝, 여전히 마음속에는

무서움이 가득했지만,

괜찮아. 나는 뒷걸음질 치지 않을 거야.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음이 목구멍에 걸릴 듯 말 듯 울렁였지만,

이번엔 목소리가 조금 더

분명하게 나왔다.

음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낮고 조용한 첫 음.

또다시 어둠 한편에서 바이올린이

조심스럽게 따라왔다.

내가 낸 음을 이어받듯,

조화롭고도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악사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번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그는 분명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대답하듯 자신의 선율을 덧붙였다.


바이올린의 선율은

점점 또렷해지고, 웅장해졌다.

나는 그 리듬 위에 내 목소리를 올렸다.

아주 천천히, 하나씩.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던 공간이

작은 화음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터져 나왔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숨겨두었던 음악 하나가

드디어 바깥세상으로 나와

노래를 시작한 것 같았다.


눈앞이 살짝 아찔했다.

나는 지금,

소리와 선율 사이를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내가 하나의 음표가 되어

오선 위를 바람처럼 흘러가는 기분.

가볍고 투명하게.

할아버지, 보고 계세요?

저, 노래하고 있어요. 어릴 적처럼.

저, 지금 용기를 내고 있어요.


속으로 간절히 속삭이며

나는 더 높고, 환한 음을 향해

목소리를 밀어 올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아니, 감은 줄도 몰랐다.

목소리와 바이올린이 하나의 선율이 되자,

내 몸이 아주 조금씩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바닥은 어느새 사라지고,

공기마저 가볍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 나 지금 떠오르고 있는 거야?’

조심스레 눈을 뜨자,

정말로 내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빛도 없고 바람도 없는데,

내 몸은 무게를 잊은 듯 가벼워졌다.


바이올린의 선율은 내 허밍을 감싸듯 뒤따랐고,

악보 속 음표들은 종이를 벗어나 공중을 날고 있었다.

나는 그 음표들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지금 나는,

음 하나, 리듬 하나가 되어

음악 속을 날고 있는 것 같았다.

투명한 물빛처럼 반짝이며,

나는 진짜 노래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할아버지… 보고 계세요?’

속으로 조용히 말하자,

검은 망토를 두른 악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진흙처럼 어두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안에서

조용하고 따뜻한 눈빛을 보았다.


그가 켜는 바이올린은,

마치 내 마음을 조용히 뚫고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잊은 줄 알았던, 아니 잊으려 했던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그 순간, 음악 속에서 나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이건 선물이야.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내준,

아주 특별한 선물.

이 음악, 이 순간, 이 세계는

지금 이 순간 나만을 위해 열려 있는 무대였다.


악사는 마지막 음을 아주 천천히 마무리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엔,

조용한 기쁨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작게, 정말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누구든, 난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 순간, 내 발끝이 서서히 바닥을 느꼈다.

공기는 다시 무게를 되찾았고,

현실이 조용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가볍고, 따뜻했다.

그건 정말 꿈처럼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리움도, 외로움도,

음악 속에서 모두 안아준

기적 같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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