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축 앞의 작은 나

2악장

by Bloom지연

― Andante cantabile

(안단테 칸타빌레 ·

노래하듯 느리게, 부드럽고 감미롭게)

햇살이 가만히 창을 타고 흘렀다.

나는 숨을 들이쉬며,

오늘의 시간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무언가 곧 말할 듯 가슴이 울렸다.


아침이 되었다.

음악은 이미 멈춰 있었고,

전축 위에 올려둔 검은 판은

처음 올려두었을 때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평소처럼 똑같은 잠옷을 입고,

할아버지가 늘 듣던 검은 판을 틀어두고,

촉감 좋은 나의 밤비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오늘 아침은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나는 전축 앞에 앉았다.

카트리지는 가만히 멈춰 있었고,

바늘 끝에는 희미한 아침빛이 고요하게 맺혀 있었다.

손끝으로 검은 판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조용히 흘러간 어젯밤을

다시 떠올리려는 나만의 작은 주문이었다.




엄마는 내 방에만 들어오면

눈꼬리를 치켜들며 전축부터 보았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어휴, 저 시커먼 골동품.

네 방이랑 하나도 안 어울리잖아.

저런 건 말이야, 할아버지 방에 있던

낡아빠진 소파 옆에나 두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있는 게 좋았으니까.


나는 클래식 음악이 좋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음악을 듣던 그 시간이 좋았다.


엄마는 늘 아침이면 부엌에서 라디오를 틀어놓았다.

빠르고 시끄러운 팝송이나 록 음악이

부엌 가득 흘러나왔다.

프라이팬에 기름 튀는 소리와 함께

음악 소리도 점점 커졌다.

“아침부터 조용한 건 답답하잖아, 그렇지?”

엄마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괜히 방문을 닫았다.


할아버지는 달랐다.

클래식 음악이 방 안에 천천히 퍼지면,

나는 꼭 할아버지 무릎에 누워 있었다.

그 따뜻한 무릎베개 위에서 동화를 들으며

스르륵 잠이 들었다.


“오늘은 장미꽃밭으로 가볼까?”

검은 판 위에서 음악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할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정말로 눈앞에

빨간 장미가 활짝 핀 길이 펼쳐졌고,

나는 그 꽃길을 따라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또 어떤 날은,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인 들판에서

얼음공주가 되어 조용히 걷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음악은 언제나 그렇게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잠든 밤이면

다시 전축을 켜고 조용히

그 시절의 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내가 가장 아끼는 그런 밤은 늘 너무 짧았고,

아침은 언제나 먼저 달려와 나를 깨웠다.




“일어났니?”

부엌에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검은 판에 얹은 손끝을 쉽사리 떼지 못한 채,

나는 그대로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루치아! “

다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못 들은 척할 수 없어

밤비를 조심스레 품에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얇은 접시들이 서로 부딪치며

딸깍딸깍 소리를 냈다.

전자레인지에선 낮고 둔한 윙윙 소리가

부엌 안을 천천히 메워갔다.

케이블선이 헐거운 라디오에서는

어딘가 익숙한 음악이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왔고,

엄마는 물기 어린 손으로 수건을 꼭 쥔 채,

싱크대와 식탁 사이를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엄마는 내 쪽은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아침 식사는 식탁 위에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토스트와 삶은 달걀, 그리고 미지근한 우유 한 잔.


나는 ‘잘 먹겠습니다’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식사 내내, 내 시선은 음악과 냄새,

소음이 뒤섞인 부엌 한가운데,

식탁의 가장 조용한 한편에 머물렀다.


말없이 시작된 아침은,

어느새 익숙한 소음 속으로 이어졌다.

학교는 여느 때처럼 떠들썩했다.

사탕 껍질이 바스락거리고,

공책 위에 낙서가 번졌고,

누군가는 발을 구르며 소리를 냈다.


나는 그 소리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말을 섞진 않았고,

누군가가 웃을 땐 나도 따라 웃는 척만 했다.

그렇게 해야 어색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상했다.

내가 있는 이 자리가,

어쩐지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아직 전축 앞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훨씬 나다웠다.

말없이도 환하게 빛나는, 진짜 나.

아주 잠깐이었지만, 하루 종일 내가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덧 밤이 되었다.




나는 커다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레이스 잠옷자락이 다리 위를 스치며

어딘가 간질간질했다.

머리는 축축했고,

시곗바늘 소리만이 또렷하게

째깍, 째깍.

그 작은 울림이,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

방 안엔, 나와 시간밖에 없는 듯, 묘하게 고요했다.




그때였다.

천장 모서리에서부터 어둠이 스르르.

진득한 진흙처럼 끈적하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툭.

고개를 내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치, 오래된 만화 속

수풀 뒤에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괴물 같기도 했고,

어릴 적 버린 줄 알았던 못난이 인형이

책장 어딘가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기도 했다.


나는 이불속 밤비를

살짝 내 곁으로 당겼다.

작고 부드러운 밤비의 촉감이

조금은 나를 덜 무섭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얇은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바닥 위에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그 빛 위로 살며시 발을 내디뎠다.

작은 소리에도 멈칫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소리 없이 전축 앞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내가 가장 편안해지는 곳.

아무도 없는 밤에도, 동화처럼

이야기가 피어나는 나만의 작은 아뜰리에.


오늘은 이상하게도,

내 방의 공기가 낯설었다.

익숙하던 것들이

어딘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보는 이야기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등 뒤 어딘가에서,

작고 검은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같은 두려움.

그래서일까.

늘 입던 잠옷이 오늘따라 유난히 불편했고,

벽에 비친 내 그림자조차 차가워 보였다.


나는 밤비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검은 전축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괜찮아.

이제 곧, 익숙한 선율이 흐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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