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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용 Jan 18. 2019

지용시선 여섯 번째

문학동네 시인선 006. 이홍섭 시집 <터미널>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어떤 나무를 심어왔고,
내 정원에는 어떤 목소리의 새가 날아왔던가.
나는 또 누구에게 날아가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오늘처럼 봄날의 노래를 들려줄 것인가.

p.16 '귀 조경' 中



문학동네시인선 006. 이홍섭 <터미널>


한줄평
함부로 '시'라고 말하지 마세요.


시인 이홍섭


1965년 강릉 태생. 서울에서 신문기자로 살다가 노스님의 수발드는 일을 하러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지금은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가 삶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지향한다고 말한바 있다.  <강릉, 프라하, 함흥>, <숨결>,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터미널>, <검은 돌을 삼키다> 5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매우 주관적인 시집 소개


처음 ‘시’라는 것에 빠져들었을 때가 떠오른다. 정말 빠져들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무언가에 홀린 듯 시를 읽었다. 틈만 나면 도서관의 시 코너에 가 잡히는 대로 읽어나갔다. 이름이 잘 알려진 옛 시인의 시 전집부터 특이한 제목을 가진 유명하지 않은 시인의 시집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내 나름의 기준에서 좋은 문장을 발견할 때면 하루 종일 들떠 어쩔 줄을 몰랐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기분이 이런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었다. 그때는 좋은 시에 대한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명확했다. 깊은 울림이 있되, 너무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글. 쉽지만 여러 번 읽게 되는 글. 그런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 ‘그런 글’이 정확히 어떤 글인지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명확히 받아들여지는 글이라는 기준이 너무 모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명확성이 어느 정도일 때, 시라는 장르가 가진 특징에 부합하는 지도 쉽게 정의내릴 수 없었다. 더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다행히도 그때보다는 좀 더 명확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다소 이상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지금 나에게 ‘그런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런 글을 쓰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좋은 시라고 규정할 수 있는 조건은 없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명확히 말하는 것은 ‘시’에 가장 위배되는 일이자 아주 위험한 생각이다. 대신 이것은 명확히 말할 수 있다. ‘시에 가까워지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써나가는 글은 좋은 글이 될 수있다. ‘시의 본질을 파헤쳐나가는 사람’이 쓴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그런 노력 없이 쓴 글은 시가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홍섭의 시를 읽으며 그 당시의 내가 강렬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좋아하던 종류의 시를 그가 평생에 걸쳐 써왔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이어나가기 위해 나는 시집을 읽는 동시에 시인에 대한 공부를 한다. 그래야 시집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당연히 이홍섭 시인에 대한 여러 자료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그가 위에서 말했던 ‘시’라는 것의 ‘처음’ 이자 ‘본질’로 가기 위한 싸움을 평생을 바쳐 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뚜렷한 의지가 과거의 나를 불러낸 것이다.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한 시인은 학생들이 시를 발표하면 그 시가 너의 실존에 얼마만큼 관계되어 있냐고 묻는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시인이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첫 시, 적어도 습작기의 시는 존재 그 자체여야 하고, 그 자신에게 실존이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언어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구원 그 자체여야 한다. 언어 아니면 나의 실존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깨우친 이후에야 비로소 ‘시인’이 될 수 있다.
 ....
시가 남사스러워지고, 시인들도 남의 시를 안 읽는 시대가 온 것은, 많은 시인들이 시인이 되기 이전에 거쳐야 할 고통스러운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가 내 실존에서 유일한 구원일 때가 한 번쯤은 있었어야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경험의 유무가 ‘시인’과 ‘비슷시인’을 가른다. 시가 유일한 구원이었던 때를 뼈에 새긴 시인은 멀리 가도 시인이다. 이것이 없는 시인은 평생 비슷시인이다.


이홍섭 |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1월호 中  

        

한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을 듣고 나는 확신했다. 시의 시작은 분명 그랬다. 당시 나에게 시는 모든 것이었다. 전부였다. 그것만이 내 삶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라 믿었다. 절박한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근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은 시가 될 수 없다.

          



시의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시의 장르성에 대한 깨달음과 시의 구성 요소에 대한 오랜 수련이 있어야 한다. 시는 산문보다 훨씬 더 고유의 장르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안팎이 단 한 번에 터지듯이, 수좌들에게서 화두가 터지듯이 장르성이 타파되는 날이 있어야 한다. 이 위에 시의 구성 요소에 대한 수련과 자문자답이 더해져야 한다. 아직도 시의 힘이 무엇이냐고 묻는 시인이 있다면 그 시인은 습작 시절로 다시 돌아가 시의 장르성부터 타파하고 와야 한다. “시라는 실체는 원래 없었다, 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말자. 그런 말을 하려면 다른 데 가서 놀아야 한다.

이홍섭 | 월간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1월호 中    

      

수족관 유리벽에 제 입술을 빨판처럼 붙이고

간절히도 이쪽을 바라보는 놈이 있다     


동해를 다 빨아들이고야 말겠다는 듯이

입술에다 무거운 자기 몸 전체를 걸고 있다   

  

저러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게, 사랑이라는 게

꼭 저 입술만하지 않겠는가    

 

p.12 ‘입술’          



그는 시라는 장르를 명확히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 장르를 타파하지 않은 사람은 시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 과정을 거친 이만이 비로소 시라는 출발점에 간신히 설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시는 수련과 자문자답의 반복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영원히 입술이 떨어지지 않을 위험을, 유리를 잘라야 할 때가 올만큼 모든 것을 거는 일. 시와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것이 ‘시’라는 장르가 잔존하는 이유이자 잔존해야하는 이유다. 어찌해도 우리가 사랑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럼.     





일평생 나무만 길러온 노인이 말씀하시길,

...

제일의 조경은 이 나무들이 철따라 새들을 불러모으고, 새들은 제각기 좋아하는 나무를 찾아들어 저마다의 소리로 목청 높게 노래 부르는 것을 듣는 일이라.

...

오랜만에 봄 창을 열고 목노인처럼 생각하거니, 나는 이 세상에 나서 어떤 나무를 심어왔고, 내 정원에는 어떤 목소리의 새가 날아왔던가. 나는 또 누구에게 날아가 키 큰 나무, 키 작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오늘처럼 봄날의 노래를 들려줄 것인가.     


p.16 ‘귀 조경’ 中     



삶을 통해 시를 자아내는 것. 시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 그 일치를 통해 비로소 그의 글은 ‘시’가 된다.     




어머니와 함께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넘어 친척 집으로 가는 길     


휘청거리는 버스 안에서

젊은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자꾸 말을 시키셨다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

일흔 넘으시며

어디 한 군데 몸 성한 곳 없는

늙으신 어머니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데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조르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말이 없으시다     


p.26 ‘멀미’ 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p.32 ‘터미널’ 中          



늙으신 어머니

손주를 들쳐 업고 자장가를 부르시네

강물이 흘러흘러 바다로 가네  

   

곱게 잠든 아이의 양손에는

맑고 이쁜 조약돌

조약돌이 흘러흘러 바다로 가네     


포대기에 다 담지 못할

저 많은 숨결과 노래들     


노래들이 흘러흘러 바다로 가네     


p.53 ‘자장가’



시간은 계속 흐른다. 사라지는 것과 살아나는 것은 서로를 조금씩 대체한다. 그것이 이 세계를 유지하는 법칙이다. 이 속절없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잔인함 속에서 우리는 삶을 생각한다. 나를 돌아보고, 서로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더 발달해 영생의 약이 개발되면 모르겠지만, 소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지금으로서 삶의 본질은 그곳에 있다. 아니, 있어야한다. 시의 본질 또한 그 맥락을 같이해야 한다.




이 터미널은 지하 1층 지상 3층     

지하에는 장례식장

지상 3층에는 산부인과


그 사이를

늙고 병든 환자들이 오간다     


사람들은 3층에서 태어나

지하로 내려갔다가

검은 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퀭한 눈으로

주머니 속의 차표를 만지작거린다     


p. 35 ‘터미널 4’               



본질이란 어쩌면 최후에 남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하는 말처럼 ‘내일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남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다. 형태는 다를지 모르지만 같은 방향성을 가진 어떤 것. 가장 간절한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본질일 것이다. 그 본질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다. 누군가 물질을 말한다면 그 물질을 말한 이유를 잘 들여다보면 분명 사람에게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왜냐.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 대해 말해야 한다. 삶에 있어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동시에, 조금이라도 덜 아픈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시집 하이라이트


삶은 굽이굽이 멀미 같은 것이어서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건네야 하는 것인데     


말 좀 해볼래

말 좀 해볼래


조르던 어머니께서는

이제 말이 없으시다


p.26 ‘멀미’ 中




한줄평


함부로 '시'라고 말하지 마세요.


평점 이유


쉽게 쓰인 시는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쉽게 읽히는 시는 처절한 고민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독서 소요 기간


3일


묵직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추천대상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 같은 사람.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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