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할머니 입분은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하루 일과를 쫑알쫑알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입분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내 새끼, 우리 애기, 언년이라는 호칭이 주로 번갈아가며 사용됐다. 그 중 어떤 것으로 불려도 입분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금새 알아차리고는 명민하게 몸을 움직일 줄 아는 아이였다.
언년아하고 부르는 소리에 아이는 쪼로록 일어나 할아버지 방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모로 누워서 물끄러미 아이가 들어오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그 옆에 앉아 까만 눈동자를 들어 쇠약해가는 할아버지와 눈을 맞추었다. 아이의 입술이 달짝 움직였다. 아무 일도 아닌데 흥미진진한 것 투성이인 세 살 인생 이야기가 노쇠한 귓가로 슬그머니 흘러들어왔다. 지저귀는 소리를 가만히 듣던 할아버지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 애기 이름 하나 져 줘야 쓰것지? 이름을 이쁜이로 혀, 미운이로 혀?
끊김없이 이어지던 아이의 말이 순간 멈추고 정적이 흘렀다. 늙은 할아버지는 갑작스런 손녀의 침묵에 당황했다. 입분은 더 이상 확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쁜이로 햐! 이쁜이로!
그 길로 입분은 입분이라는 이름의 인생을 살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이쁘다는 말을 듣게 되는 인생을. 입분은 말이 삶을 만들고 조각하는 칼같은 것이라고 믿었다. 알게 모르게 쌓인 이쁘다는 말이 꼭 구십 평생을 끌고 온 것 같다고, 지난하고 고되던 순간들도 그렇게 쌓이고 쌓인 말 앞에서는 무기력해지더라고. 인생을 살다가 꼭 운명이 자기를 밀어 넘어뜨리는 것 같다고 느낄 때 입분은 입분이 입분이하며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입분의 이름에 관한 에피소드를 200번 쯤 들었지만 여전히 그 이야기를 좋아한다. 예측불가한 이야기 보따리이자 생생한 다큐멘터리 같은 그녀의 삶을 나는 조금씩 엿들으며 커왔다.
입분과의 대화에서 팔할은 식사 안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하루에 네끼를 먹었다. 삼시 세끼와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 먹는 야식 밥상. 엄마 미란이 밤샘 근무를 하는 날이면 우리집에서 오분 거리에 있는 입분의 집으로 갔다. 입분은 밤 11시가 조금 못되는 시간에 숟가락 젓가락까지 준비된 식탁을 차리고 나를 기다렸다. 든든히 먹고 내일도 최선을 다해 공부할 나를 상상하며 만들었겠지만 입분의 요리는 때때로 공부를 방해했다. 학교 일과가 끝나기 10분 전에는 꼭 입분이 만든 음식 중 좋아하는 메뉴의 목록을 적으면서 시간을 때웠다.
고춧가루 매운내가 풀풀 나는 묵은지김치찌개.
계란물을 풀어 얹어 두툼하고 든든한 두부조림.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마늘장아찌.
입분네에 도착하면 밥상을 받아먹고는 양치만 뚝딱 하고 곧바로 잠들었다. 지방이 매일 몸 안에서 기세등등히 우위를 점해갔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체중계 위 숫자에도 아랑곳 않고 꾸준히 온 열심을 다해 먹었다. 다채롭고 진실되고 황홀한 밥상을.
하루가 달리 커지는 몸에도 뚱뚱하다거나 살을 빼야만 한다는 생각에 닿지는 않았다. 지금보다 10kg이 더 쪄 있었을 때 입분은 말했다.
늘씬허구 아주 멋져~ 잉? 앞으로 잘 먹어서 그 몸을 유지만 하믄 되것다.
지금보다 15kg이 불어 있었을 때는 '너무'를 연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딱 보기가 좋다! 너무 이뻐서 좋아. 키가 크니께 너무 멋이 있어서 딱 그 정도를 유지하믄 아무 문제 없것어.
대학교에 입학해 한달 동안 10kg를 빼고 간만에 입분의 집을 찾은 날 입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크게 상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깊고 슬픈 냄새가 그녀에게서 훅 끼쳐왔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약해졌다. 밥을 안먹는 것은 나인데 왜 입분이 더 힘들어할까. 괴로워하는 입분을 보는 게 다이어트보다 더 고됐다. 그래도 어떡하나. 스무살이었고 마른 꽃잎같은 동기들 사이에 서 있는 내 몸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진 것을. 이미 혹독한 다이어터의 길에 들어선 나를 나 자신조차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목표한 체중까지 다이어트를 끝마칠 동안 입분의 집에 가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시간이 흘러 예전처럼 혈기왕성하게 먹기 시작하고 나서도 입분과의 통화는 밥 이야기로 시작해 밥 이야기로 끝난다.
내 몸 구석구석을 창조한 입분의 존재가 너무 커서 꼭 밀어낼 수 없는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진다. 그 위에서 먹고 자고 기대어 쉬면서 지금껏 잘 살아남았다. 앞으로 남은 여름과 겨울, 나는 그에게 잠깐 앉아 쉴 수 있는 작은 나무 밑동 같은 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도록 애써볼 것이다. 시원한 곳에 잘 자리잡아 깨끗하게 표면을 가다듬어야지. 이번엔 내가 그를 오랫동안 기다려야지. 나무 밑동에 앉아 어린 날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는 입분의 목소리를 잠자코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