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의 반찬들

도쿄 도란소란

by 여럿

일본 수퍼마켓의 백미는 매일 신선하게 요리되어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반찬 매대다.

달달한 간장 소스 옷을 입고 있는 고기완자, 고급스런 맛이 나는 가지요리, 통통한 히레 돈까스와 한국식 나물까지. 반찬은 자칫 간소해질 밥상을 든든히 보좌해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한거지? 매대를 돌다보면 그 치밀한 멤버 구성에 감탄하게 된다.


가게별 특색 메뉴를 찾는 재미도 만만찮다. 집에서 가까운 수퍼마켓에서 좋아하는 메뉴는 두부로 만든 함바그다. 굽기 정도와 오묘한 소스 맛이 일품이라 한입 베어 물 때마다 놀랍다.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쇼핑몰 지하 1층에 있는 마트는 거의 격주로 새로운 반찬이 소개되는 게 큰 장점이다. 만든 반찬은 유통기한이 딱 당일까지라 19시 쯤 가면 3-40퍼센트, 20시 이후에 가면 땡처리 반값 세일을 한다. 싼 가격에 집어온 반찬을 예쁜 접시에 단정하게 올려두기만 해도 식탁이 근사해지니까 일주일에 두세번은 꼭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게 된다.


반찬을 사서 먹는 나를 보면 엄마는 어떤 생각을 할까. 한국에서 먹던 집밥 밥상에는 엄마 란이 만든 다양한 반찬이 올랐다. 냉장고에 착착 쌓여있는 반찬통을 그대로 꺼내 식탁 위에 벌여놓으면 금세 식탁이 가득 차곤 했다. 시금치된장무침, 버섯가지볶음, 찐꽈리고추무침, 오뎅볶음 같은 건 상비약처럼 준비돼 있었고 철마다 다른 찬이 냉장고에 소복하게 쌓였다. 란은 이것도 저것도 맛이 좋다면서 먹어보길 권했지만 내 젓가락은 김치찌개, 고등어 조림 같은 메인 요리 근처만 맴돌았다. 그러면 란은 애써 만든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처럼 중얼거렸다.

“반찬을 만들면 뭐하노… 식구들이 안먹어서 버리는데…”

나는 눈치를 보다가 그제서야 반찬 쪽으로 젓가락을 옮기곤 했다. 엄마 반찬을 박대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모양도 맛도 종류도 다르긴 하지만) 반찬을 돈주고 사서 식탁을 꾸미는 지금이 머쓱해진다. 사실 맛으로 따지자면 란이 만든 게 훨씬 탁월한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마트 직원이 만든 반찬을 먹으며 란의 부엌을 생각한다. 셀 수 없는 반찬에 숨을 불어넣은 란의 손에 대해. 매일 바뀌는 메인 요리 옆에 놓여 식탁을 수놓던 조연들에 대해. 평범함과 단촐함이 남기고 간 것에 대해. 내가 먹었던 음식은 이미 철저한 소화 과정을 거쳐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반찬은, 인생 전반에 걸쳐 자기 흔적을 지겹게도 꾸준히 남겨온 반찬만은 여전히 내 속에 남아 있다. 그건 잊을 수 없는 문장처럼, 듣지 않아도 가사를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처럼 나를 지키는 무형의 힘이 되었다. 그게 남아 있는 한 나는 절대로 굶어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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