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Marx-Allee와 거리의 청년
2014년 12월 31일 - 2015년 1월 1일, 베를린
베를린에서 새해를 맞았다.
1월 1일 새벽 한 시에도 여전히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으며 눈이 마주치면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안아주고 새해 인사를 했다. 내년 새해에도 혼자 베를린에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핸드폰도 되지 않고 숙소도 구하지 못한 채 무작정 온 터라 꼼짝없이 길거리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으나, 에어비엔비를 통해 얼마 전 내 기숙사에 머물렀던 동갑내기 중국인 친구가 기꺼이 자신의 숙소를 내주었다. 시내는 곳곳이 통제되었고 사람이 너무 많아 지하철도 서지 않았지만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와 따뜻한 음료까지 사주던 그 마음이 너무 고맙다.
아침 8시, 밤베르크로 돌아가는 버스시간이 2시간 남아있었다. 전날 아침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지 못한 터라 지하철역 패스트푸드점에서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샀다. 간이 테이블 두 개가 서있는 협소한 자리에 한 청년이 혼자 앉아있었다. 그의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그는 깨끗하게 비운 일회용 접시와 포크, 휴지의 자리를 의미 없이 계속 바꿔가며 정갈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동안 적어도 네 명의 노숙인이 말을 거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거리의 청년인 것 같았다.
앉아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는 물론이라며 웃어 보였다. 소시지는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반도 못 먹었는데 벌써 배가 불렀다. 그에게 조금 더 드시겠냐고 물었다. 그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내가 너무 많아 못 먹겠다고 하니 그제야 그는 트레이를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그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는 가야 할 곳을 어떻게 가는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길을 물었다. 그는 내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타인의 삶'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드라이만이 자신을 위해 쓴 책,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를 발견한다.
드라이만은 동독정부의 부조리를 폭로하고자하는 극작가였고 주인공은 이를 감시하는 냉혈한 비밀경찰 간부였다. 주인공은 곧 드라이만을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연민하게 되어 의도적으로 상관에게 그의 행적을 보고하지 않기 시작한다. 동서독 통일 후 우체배달부로 살아가던 그는 드라이만이 쓴 책에서 '이 책을 HGW/XX7에게 바칩니다.'라는 글을 발견한다. 그는 우체국에서 무료하게 일하던 것과 다른 표정과 발걸음으로 책을 사서 서점을 걸어나온다. 새벽에 그 장면에서 나오는 Karl-Marx-Allee 에 다녀왔다고 하니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거리는 원래 Stalin-Allee 였으며,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계획은 이렇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조성된 거리라고 했다. 그런 그곳이 지금은 아주 비싼 땅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건물은 웅장하고 고급스럽지만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넓은 6차선 도로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한 거리 위에 서있노라면 자신이 매우 작게 느껴진다고 했다.
내가 영어로 잠시 전화 통화를 하고 나자, 그는 영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영어는 완벽했다. 말투는 느렸지만 그는 또박또박 정확하게 이야기했고 매우 적절한 표현을 구사했다. 그는 태국을 여행한 적 있다고 했다. 한국은 가보지 못했지만 꼭 한번 여행해보고 싶다며, 서울이 도심 한복판의 자동차 도로를 막아 광장을 만든 것이 굉장하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버스 시간이 채 30분도 남지 않았다. 등 뒤에 두었던 백팩이 잠시 들썩거렸다. 소매치기였다. 그는 내 가방을 통째로 들고 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 선지 나와 거리의 청년을 번갈아 보며 황급히 사라졌다. 그는 나를 지하철을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고 더 빠른 길을 알려주었다. 서두르긴 했지만 덕분에 버스 시간 1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베르크로 돌아오는 5시간 동안 불과 만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