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기억

by 지유JiYou

유튜브 채널 [사고실험]에서 요조 인터뷰를 보다가 문득 떠올리게 된 서점의 풍경.. 어렸을 때 무작정 가고 봤던 동네 서점, 책 냄새, 책 진열 구도.. 약간 색이 바랜 듯한 누런빛으로 다시 떠오른다. 영상을 잠시 멈추고 인터뷰와는 상관없는 나의 이야기에 빠져 본다.


그래.. 내가 잊고 있었지. 나는 그냥 나가서 막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바뀌게 된 건지.. 결혼하고 나서부턴가? 혹시 외국에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일까? 아니면 화장을 해야 나갈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화장실 걱정을 하게 된 것 같기도.. 모든 게 다 그냥 핑계다. 나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성향이 바뀐 걸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알아차린다. 왠지 조금 억울하다.


어렸을 때 나는 밥을 먹고 나면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보통 서점에 가거나 문구점, 음반 가게를 갔다. 서점에 가서 아무 책이나 집어서 조심조심 새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훑어보는 걸 좋아하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부분은 절대 보지 않았다. 책에 대한 나의 예의였다. 책이 자신의 두께만큼 우여곡절을 들려주고 나서 드디어 끝맺는 마지막 문장을 나는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알았다. 책 내용을 이미 알고 가서 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서점의 문을 열고 냄새를 맡고 사방에 꽉 찬 책장을 쓰윽 둘러본다.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을 걷다가 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제목을 보고 제목의 글씨체를 보고 책 등허리의 색깔을 본다. 마음을 끄는 한 책을 꺼내어 든다. 표지 디자인을 감상한다. 마음에 든다. 표지를 열면 쓰여 있는 작가의 소개를 읽고 그 뒤에 따라오는 책에 대한 소개 글이나 띠지에 설명된 글을 읽는다. 그리고 책을 조심조심 열어 문체를 훑어본다. 나한테 맞는 문장의 리듬임을 느끼게 되면 흥미로운 그 책을 점점 더 읽고 싶어진다. 그렇게 페이지를 한 장 두 장 세 장 넘기다 책을 덮고 계산대로 가 계산을 한다. 그날은 하루 종일 그 책을 읽는다.


지금은 책 소개를 하는 라디오를 듣거나 영상을 보고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적어놓았다가 인터넷 주문을 제일 많이 한다. 서점에 가도 책을 둘러보고 즉흥적으로 사기 보다 이미 광고가 되어있거나 검증이 된 인기 많은 책을 하나 사들고나온다. 보통은 내가 사려는 책이 어떤 내용인지 대충 안다. 이미 소개를 하는 매체를 통해 들었으니까. 찾는 책이 없으면 주문을 하고 나온다. 왜 이렇게 재미없게 되었지..? 낭만도 없고 멋도 없다. 서점에서 새 책을 집어 들고 두근두근 가슴이 떨리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데. 그나마도 서점을 갈 수 있으면 다행이다. 서점들이 슬슬 문을 닫는다.. 동네 서점 하나가 폐업했다. 그쪽으로 하도 안 지나가서 폐업을 한 걸 안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은 듯하다. 씁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나의 가방엔 전자책 리더가 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이웃이 틀어 놓은 테크노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 담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트럼펫 소리가 불협으로 묘하게 얹어진다. 불협이지만 이상하게 설득이 되는 소리의 조합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바람이 부는 소리도 얹어진다. 비행기 소리와 자동차 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철 대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이웃 아이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는 소리, 뒤따라 나온 아빠의 목소리… 온갖 작은 소음들이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오늘은 토요일. 파리 시내는 소란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 안에 가만히 앉아 글을 끄적인다.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이 눈에 들어온다. 토요일에 나가는 걸 싫어한다. 그래도 오늘은 한번 서점에 가볼까 싶다. 책 냄새가 맡고 싶다.






제목 : 서점


추억이 되고 있는 장소가 있다

책이 사람보다 많은 곳

그 이름은 서점


기억하고 있나요?

책이 많이 모인 곳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그 냄새


책들이 어깨를 맞대고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부드러운 위엄


책 등허리에 쓰인

낯설고 익숙한 글씨


책들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책을 눕혀 본 경험

그 책을 살며시 빼내어

손에 쥐어 본 촉감


마지막을 미리 알려고 하지 마세요

책의 두께만큼

하고 싶은 말을 들어 주세요


폐업한 서점을 지나가는

나의 가방 속 전자책 리더기


나도 모르게 바뀐 세상

나도 모르게 바뀐 나

낭만과 멋이 사라진 습관

조금 억울하지만


우연히 찾아온 불협의 조화에

생각을 맡기고

오늘은 오랜만에 서점에 가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