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드디어 읽어 보았다. 한국어 번역 버전 이북으로 보았다. 최정수 번역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099.
작가의 짧은 이 경험담은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라는 것에서 조금 놀랍다. 경험 자체가 놀라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설의 형식으로 세상에 내놓았다는 점이 놀랍다는 것이다. 이런 말 못 할 경험이 한 번쯤 있어서 공감을 하며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간접적으로 상상하며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보는 사람도 꺼림칙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글이 전개되는 방식도 독특한데 남자와의 정확한 추억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연애가 시작되고 끝나는 과정이 충분히 설명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한 상황을 묘사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자신의 심리 상태만을 스스로에게 가혹할 정도로 솔직하고 상세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럼에도 나의 머릿속에는 그들이 겪었을 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사실인 게 명백하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일기를 읽었다고 생각하기엔 문체가 너무 잘 절제되어 있다. 건조한 말투와 대조적으로 주제가 주제인 만큼 충분히 흥미로웠다. 연애와 심리적 상태 보고서를 읽은 느낌이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것이라서 그런 걸까? 에세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르의 경계가 점점 애매해지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나는 여기에 관해서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단순한 열정에서 내가 크게 공감한 부분은 이렇다. 작가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요즘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고 있는지 털어놓고 싶음과 동시에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까 두려워한다. 어쩌다 참지 못해 이야기를 하고 나면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곧 사라지고 마구 이야기해 버린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다. 말로 전해지는 것들은 자기가 가지는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런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공감을 위해 발설했다가 나에게 소중했던 무언가가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경험, 그 허무함. 나는 내가 경험한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듣는 사람은 별 감흥이 없거나 그런 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 상대의 판단은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 나를 슬프게 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얼마나 가치 있는가와는 무관하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도 그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경험도 가치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에 빠졌을 때 발견되는 나 스스로의 가치이다. 말로 전하기엔 그 무게가 제대로 실리지 않는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부족하다. 평범한 단어와 식상한 말투로 전달되다가 그냥 공기 중에 날아가 버린다. 작가들은 이런 것들을 붙잡으려 글을 남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로 발설해서 가치를 떨어뜨리기보다 글로 정성스럽게 아로새겨 남겨 놓는 것이다. 문장을 간결하게 다듬고 사실 그대로 내가 원하는 가치를 최대한 객관적이게 남긴다. 나에게 아니 에르노의 글은 감정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정성스러운 기록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평생 치부로 남을 수도 있는 경험을 숨김없이 세상에 꺼내놓은 용기는 작가의 숙명이 아닐까.
작가는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가치를 매기기 위해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더 자극적일지도 모른다. 미화는 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작가의 글에서는 지극히 사실만으로 묘사된 표면적인 경험들과 남에 의해 관찰된 것 같은 본인의 심리 상태만이 나열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서는 자극적인 상상과 연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상당 부분에서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런 불편함이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도덕적 판단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가에 대한 연민이 공감과 닮은 형태로 일어나 잠시 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보류하고 싶은 마음과 어디선가 밀려들어오는 사회적 질타에 대한 두려움이 읽는 내내 내 마음속에 공존했다.
사랑이라 불리려면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 걸까? 사회에서 원하는 도덕적 관계를 맺는 것이 사랑의 정석일까? 욕망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작가가 욕망에 대해서 쓴 문장들이 책을 다 읽은 후 한참이 지나도 나의 마음에 걸려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 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서 사라져 갔다.”
욕망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문장이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서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때로는 그것이 사랑의 척도가 되는 것만 같아 혼란스럽다. 하지만 작가는 이 경험에 가치를 주고 싶다. 가치를 주는 것이 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작가는 건조한 작문 스타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를 “열정”이라 이름 짓는다. 열정은 욕망과 사랑 그 언저리에서 그 둘을 이어준다. 이제 관계는 끝이 났고 그 여파를 붙잡고 있는 대신 보내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이제 과거가 된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쓰며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해 글로 남긴다. 책을 씀으로써 작가의 이 짧은 열정은 비로소 끝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