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통증은 시기심이 아니라, 잘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토요일 오후, 적막한 방 안을 채운 건 '카톡'하고 울리는 짧은 알림음이었다. 단톡방에는 친구의 신혼집 인테리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거실,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원목 식탁,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두 개의 머그컵.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우와, 너무 예쁘다! 역시 센스 최고"라는 메시지와 함께 하트가 그려진 이모티콘을 전송했다.
화면 속 친구의 행복은 명백히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핸드폰을 엎어놓고 마주한 내 방은 유독 비좁고 어두웠다. 어제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 정리되지 않은 빨래더미. 순간 설명하기 힘든 통증이 명치 부근을 눌렀다. 친구의 기쁨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내가 못 견디게 옹졸해 보였고, 그 화려한 풍경 속에 내 자리는 영영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이 밀려왔다.
이 미묘한 통증은 친구의 잘못도, 나의 악의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탄 인생의 궤적이 조금씩 달라지며 생겨난 불가피한 '비교의 그늘'이었을 뿐이다.
얼마 전, 가장 오래된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을 가진 신랑과 도심 한복판의 화려한 예식장. 행복해 보이는 친구의 미소를 보며 나는 진심으로 웃었다. 그녀가 그 행복을 얻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버텼는지, 퇴근길에 나와 통화하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예식이 끝나고 마주한 뷔페 접시는 유독 맛이 없었다.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 사이에서 나는 가장 익숙한 김밥 몇 조각과 샐러드만 깨작거렸다. 주변 친구들이 "너는 언제쯤 가니?", "요즘 뭐 하고 지내?"라고 던지는 가벼운 질문들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음식들은 모래알처럼 서걱거렸다.
돌아오는 차 안 창가에 비친 내 모습은 유독 낯설고 쓸쓸했다. "정말 잘 됐다"라고 뱉었던 나의 다정한 말들은 허공에 흩어졌고, 가슴속에는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남았다. 친구의 행복이 선명해질수록 나의 결핍이 도드라지는 기분. 친구가 올라간 계단이 보일수록 내가 서 있는 평지가 낭떠러지처럼 느껴지는 이 비릿한 감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나는 왜 자꾸만 작아지는 걸까. 생각해 보면 나는 늘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를 비교하고 있었다. SNS에 올라온 사진들은 그들이 겪어온 인고의 시간과 지저분한 뒷이야기를 생략한다. 그 사진 뒤에 숨겨진 고단한 대출 이자와 직장에서의 갈등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 있다.
반면, 나의 삶은 편집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다. 아침마다 붓는 얼굴, 상사의 눈치를 보며 삼키는 수치심, 카드 명세서를 보며 내뱉는 한숨, 주말 내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무기력함까지. 타인의 찬란한 정점과 나의 남루한 바닥을 비교하는 순간, 불행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실 내가 부러운 건 친구의 명품 가방이나 넓은 집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안정감'이 탐이 났던 거다. "비교는 사실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나를 향한 날카로운 잣대였다." 친구가 미운 게 아니라, 친구만큼 잘 나가지 못한 내가 미웠던 거다. 타인의 행복을 거울삼아 내 부족함을 비추어 보는 습관이 깊어질수록, 나는 축하의 자리에서 기쁨 대신 상처를 안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엔 잘못이 아니라 다른 속도가 있을 뿐이다." 참 따뜻한 위로지만, 가끔은 그 문장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내 열차만 고장 난 채 멈춰 서 있는 것 같을 때. 내 길만 유독 끝이 보이지 않는 가파른 오르막길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30대에게 비교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불안이다. 결혼, 커리어, 자산. 사회가 정해놓은 촘촘한 체크리스트를 친구들은 하나둘 지워나가는데, 내 리스트만 하얗게 비어 있을 때 느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사람마다 때가 다르다"는 조언은 너무 멀고,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공포는 너무 가깝다.
친구의 경사를 보며 나의 실패를 점치는 버릇이 생겼다. 친구의 성취가 나에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축하의 진심을 오염시켰다. 마음껏 축하해주고 싶다가도, 그 모습이 혹시 패배자의 비굴한 너그러움처럼 보일까 봐 겁이 났다. 그렇게 나는 가장 친했던 친구를 '나의 실패를 확인시켜 주는 거울'로 치부하며 조금씩 연락을 뜸하게 했다.
오랫동안 내 안의 시기심을 부정해 왔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건 못난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나는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초연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하지만 감정은 억누를수록 기형적으로 변했다. 친구의 자랑 섞인 말에 가시 돋친 농담을 슬쩍 던지거나, 기쁜 소식을 듣고도 "바빠서 못 봤어"라며 일부러 답장을 늦게 하는 식의 옹졸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시기심은 악한 마음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알려주는 '결핍의 신호'라는 것을. 친구의 결혼이 부러운 건 나도 기댈 수 있는 정서적 안정을 원한다는 뜻이고, 승진이 배 아픈 건 나도 내 가치를 증명받고 싶다는 갈증의 표현이었다.
그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그래, 나 사실 저 친구가 정말 부러워. 나도 저런 안정을 갖고 싶어."라고 솔직해지는 순간, 타인을 향했던 날 선 감정이 나를 돌보는 에너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교의 잣대를 상대의 가슴에 대고 상처를 내는 대신, 내 삶의 지도를 그리는 도구로 쓰기로 했다.
비교라는 늪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타인의 궤도를 훔쳐보는 일을 멈추고, 다시 나의 길을 응시하는 것이다. 친구가 1등석 열차를 타고 달린다고 해서 내가 탄 무궁화호가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1등석 안에서도 누군가는 멀미를 하고, 무궁화호 창밖으로도 누군가는 눈부신 노을을 발견한다.
화려한 집을 가진 친구에게는 수십 년간 갚아야 할 대출금이 있고, 아이를 키우는 친구에게는 자신을 지워가며 버티는 헌신이 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결과물' 뒤에는 우리가 결코 감당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를 '과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었다.
이제 나는 친구의 소식을 들을 때 마음의 통증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 또 비교하는 마음이 올라오는구나. 내가 지금 많이 지쳐있구나."라고 나를 먼저 다독인다. 나를 충분히 안아주고 난 뒤에야 비로소 친구에게 건네는 "축하해"라는 말에 진심의 온기가 실린다.
친구의 행복은 나의 불행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저 세상에는 저런 형태의 행복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샘플일 뿐이다. 친구가 열어젖힌 문을 보며, 나 역시 언젠가 나만의 문을 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오늘도 단톡방에 누군가의 기쁜 소식이 올라온다. 잠시 멈칫하던 손가락을 움직여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넨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속삭인다.
"남의 꽃밭이 예쁘다고 네 꽃밭에 독을 뿌리지 마. 네 꽃은 네가 물을 줄 때만 피어날 수 있으니까."
행복을 축하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내가 그만큼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잘 살고 싶어 했기 때문임을, 이제는 안다. 그 아픔조차 내가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동력임을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