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아끼는 사람
어느덧 서른의 문턱을 넘어서며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기술은 ‘말을 고르는 법’이 아니라 ‘말을 참는 법’이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세상 모든 것이 궁금했고, 나의 슬픔이나 기쁨을 누군가에게 전이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때의 대화는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날것의 감정들이었으며, 설령 그것이 정제되지 않아 타인에게 생채기를 낼지언정 ‘진심’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용인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대화의 흐름 속에서 내뱉을 단어의 온도와 무게를 먼저 가늠한다. 이 말을 했을 때 상대가 느낄 피로감, 나에게 돌아올 비난의 화살, 혹은 공허한 위로의 메아리. 그런 것들을 계산하다 보면 결국 입안에 맴돌던 문장들은 삼켜져 위장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침묵은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직장 생활 5년 차, 이제 나는 안다. 내가 내뱉은 솔직함이 때로는 무능함으로 비치고, 나의 서운함이 때로는 예민함으로 치부된다는 것을. 회의 시간의 불합리함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다이어리에 정갈한 글씨로 불만을 적어 내리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누군가의 무심한 말투에 상처를 입어도 "아, 진짜? 웃기다"라며 적당한 웃음으로 넘기는 법을 익혔다.
말을 아끼는 이유는 명확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내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가 돌아오는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느끼는 그 서늘한 배신감을 감당하기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편이 마음 편했다. "요즘 힘든 일 있어?"라는 질문에 "그냥 그렇지 뭐, 다 똑같지."라고 대답하는 순간, 나는 안전해진다. 상대는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나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까. 침묵은 나를 지켜주는 가장 단단하고 차가운 요새였다.
하지만 그 요새 안에서 나는 조금씩 질식해가고 있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기기 시작하자,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 자신과 가장 멀어졌다. 타인에게 들리지 않게 숨긴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내가 정말로 화가 났는지, 슬픈지, 아니면 그저 지쳤는지조차 구분하기 모호해지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아끼고 아껴왔던 그 말들이 사실은 나를 지탱하던 뼈대였다는 것을.
투명해진 마음과 사라진 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관계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전적으로 양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 듣고 싶어 하는 대답만을 내놓다 보면 나의 실체는 점점 투명해진다.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배려와 예의의 수준은 매우 가혹하다. 우리는 직장에서 ‘유연한 동료’여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공감 잘하는 친구’여야 하며, 가족 앞에서는 ‘철든 딸’이어야 한다. 이 모든 역할극 속에서 우리의 진짜 목소리는 소음 취급을 받기 일쑤다.
어느 날 저녁, 오랜 친구와 술잔을 기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자신의 이직 고민과 연애 문제로 한 시간을 넘게 떠들고 있었고, 나는 적절한 추임새와 고개 끄덕임으로 그 시간을 채웠다. 내 마음속에도 사실 오늘 오후 상사에게 들었던 모욕적인 언사나,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허함에 대해 쏟아놓고 싶은 갈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입을 떼려는 찰나, ‘지금 이 친구도 힘든데 내 얘기까지 얹어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앞질러 나갔다.
결국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말을 하지 않아 지켜낸 평화가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쌓아 올린 침묵의 벽이,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마저 가두어 버린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기다 보면, 결국 나만 들리지 않는다"는 그 문장이 가슴을 찔렀다. 내가 내 감정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데, 누가 나의 존재를 알아줄 수 있을까.
적당한 소음이 필요한 이유
우리는 흔히 침묵을 미덕이라 배우지만, 인간관계에서의 지나친 침묵은 서서히 진행되는 부식과 같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이미 녹슬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말을 아끼는 것이 결코 성숙함의 증거가 아님을 안다. 그것은 그저 상처받기 싫어 도망치는 비겁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성숙은 내 감정의 민낯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타인과 부딪칠 때 발생하는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서 나온다. "나 사실 그 말 들었을 때 조금 서운했어"라고 말하는 것, "지금은 네 얘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어, 나도 좀 힘들거든"이라고 선을 긋는 것. 이런 말들이 관계를 망칠까 봐 두려워 숨어버렸던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내가 내뱉은 진심이 거절당했을 때의 수치심이다. 하지만 그 수치심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깊은 연결을 맺을 수 없다. 말을 아껴서 얻은 평온함은 가짜다.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걷는 것과 같다. 오히려 적당한 소음과 충돌이 있는 관계가 훨씬 건강하다. 내가 내 목소리를 낼 때, 상대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용기를 얻고, 비로소 그 사이에서 진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를 다시 듣기 시작하는 연습
최근 들어 나는 다시 말을 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한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아무거나 괜찮아"라고 말하는 대신 "오늘은 따뜻한 국물을 먹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 누군가의 무례한 농담에 억지로 웃어주는 대신, 잠시 침묵하며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
처음에는 이 작은 목소리조차 내는 것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상대가 나를 까다로운 사람으로 볼까 봐,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 될까 봐 여전히 불안하다. 하지만 신기한 점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조금씩 선명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정말로 행복을 느끼는지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감각으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말을 아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고요한 호수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밑바닥은 썩어가는 침전물로 가득할 수 있다. 이제 나는 호수의 수면을 흔드는 돌멩이가 되기로 했다. 파동이 일고 물결이 요동치더라도, 살아있는 물이 흐르게 하고 싶다.
서른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어렵고, 앞으로도 나는 종종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 갇혀 있던 '나'를 꺼내어 세상의 소음 속에 섞어 놓는 일. 그것이 지금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관계의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