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되려다 보니,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다가 낯선 얼굴을 발견한다. 그 얼굴은 분명 내 이목구비를 하고 있지만, 표정만큼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닌 것 같다. 타인의 요구에 적절히 반응하고, 분위기를 흐리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조정된 ‘사회적 표정’. 30대로 넘어오며 내가 가장 능숙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모습을 기대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에 맞는 맞춤형 인간이 되어주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거절을 잘 못 하고, 남의 배려를 우선하며, 갈등을 만드는 것보다 내가 조금 손해 보는 쪽을 택하는 성정. 하지만 그 ‘좋은 사람’이라는 찬사가 쌓일수록,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는 동안, 정작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목소리는 소음 취급을 받으며 사라져 갔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딸, 선생님의 신뢰를 받는 학생,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상사의 신임을 얻는 유능하고 온순한 대리. 이 연쇄적인 기대의 고리 속에서 우리는 나의 욕망보다 타인의 만족을 먼저 살피는 감각을 발달시킨다. 특히 30대 여성에게 주어지는 기대치는 더욱 복합적이다. 일도 잘해야 하지만 모나지 않아야 하고, 자기주장이 확실해야 하지만 고집스러워 보여서는 안 된다.
나는 이 미묘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살았다.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으면 내 피곤함은 뒤로한 채 밤새 들어주었고, 팀장이 무리한 업무를 맡기면 "네, 제가 해볼게요"라는 대답을 습관처럼 내뱉었다. 그것이 관계를 지키는 법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를 만족시킨 대가로 얻은 것은 관계의 안정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의 희미해짐이었다.
누군가의 기대를 맞추는 행위는 달콤한 마약과 같다. 상대를 만족시켰을 때 돌아오는 안도감과 칭찬은 잠시나마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을 주지만, 그 과정에서 ‘나의 의지’는 철저히 배제된다. "너는 참 좋은 애야"라는 말은 사실 "너는 참 다루기 쉬운 애야" 혹은 "너는 내 불편함을 감수해 주는 사람이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무너졌다.
기대를 맞추는 삶이 무서운 이유는, 어느 순간 선택의 기준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먹고 싶은지, 주말에 어디를 가고 싶은지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이직이나 결혼 같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까지, 기준점이 ‘나’가 아닌 ‘남’이 되어버린다.
"이걸 선택하면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지?", "이렇게 행동하면 동료들이 나를 좋게 봐주겠지?"
이런 필터를 거친 선택들 속에서 나의 진심은 늘 뒷순위로 밀려났다. 친구들이 유행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쫓을 때 나도 뒤처지지 않으려 애썼고, 누군가 결혼 소식을 알리면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나도 저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가 투영된 스크린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작 문제는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디서부터 나를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해야만 할 것 같아서 좋아한다고 믿어온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상태. '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버린 나는, 그 프레임을 깨고 나가는 순간 마주하게 될 타인의 실망이 두려워 스스로를 더 좁은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는 고백은 처절한 자기반성인 동시에 절박한 생존 신호다. 이제는 기대를 배신할 용기가 필요하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누군가를 실망시키더라도 나를 지키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삶임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나를 ‘착한 사람’으로만 활용하던 관계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손실이 아니라 정화다. 나의 불편함을 말하고, 나의 욕구를 주장할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가 선명해진다. 기대를 맞추느라 잃어버렸던 나의 목소리는 사실 아주 작은 속삭임으로 내 안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나는 이게 더 좋아", "오늘 나는 좀 쉬고 싶어."
이 작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타인의 박수 소리에 묻혀버린 나의 가녀린 진심을 다시 중심에 세워야 한다. 내가 나에게 먼저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은 결국 바닥이 드러날 희생일 뿐이다.
서른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덕목은 '적절한 실망을 안겨주는 법'일지도 모른다. 모두를 만족시키려다 나를 잃는 비극을 멈추기 위해, 나는 이제 기꺼이 누군가의 기대 밖으로 걸어 나가려 한다. 그곳에 비로소,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던 진짜 내가 서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