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나만 노력하는 관계

언제나 내가 먼저 해야하는 관계는 이미 균형을 잃은 것이다

by 김지윤


어느 날 문득 휴대폰의 메신저 창을 끝없이 위로 올려본 적이 있습니다. 대화의 시작은 언제나 나였고, 질문을 던지는 쪽도, 약속 시간을 제안하는 쪽도 항상 나였습니다. 상대의 대답은 짧았고, 나의 문장은 길었습니다. 화면 속에 펼쳐진 대화의 파란색과 하얀색 말풍선의 비율이 이토록 비대칭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습니다. ‘아, 이 관계를 지탱하고 있었던 건 오로지 나였구나.’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가는 시기, 우리는 인생의 가장 치열한 변곡점을 지납니다. 누군가는 커리어의 정점을 향해 달리고, 누군가는 가정을 꾸리며 새로운 역할을 입습니다. 각자의 삶이 바빠진다는 핑계는 전매특허처럼 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나만 ‘먼저’ 손을 내밀고 있다는 기시감은 지우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애정'이라고 믿었습니다. 내가 조금 더 여유가 있으니까, 내가 이 친구를 더 좋아하니까, 내가 원래 성격이 살가우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먼저 연락을 하고, 상대의 스케줄에 맞춰 나의 주말을 비워두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배려'는 서서히 '의무'가 되었고, 결국에는 '허기'가 되었습니다. 나만 노력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영양실조에 걸리고 맙니다.


관계를 유지하는 힘은 시소의 원리와 같습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무게를 싣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리듬이 있어야 그 놀이는 지속될 수 있습니다. 만약 한쪽이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면,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공중에 매달려 버둥거리거나 혼자서 힘겹게 발을 굴러야 합니다. "언제나 내가 먼저였다면, 그 관계는 이미 균형을 잃은 것"이라는 문장은 차가운 경고등과 같습니다.


우리가 관계에서 '노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이미 그 관계는 자연스러움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모든 인간관계에는 적절한 정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정성이 한쪽의 일방적인 구애처럼 변질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통이 아니라 '구걸'에 가까워집니다. 상대방이 바빠서 연락을 못 한다는 말을 믿고 싶지만,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화장실 갈 시간은 있고, 아무리 정신없어도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나중에 연락할게'라는 한 문장을 남길 마음의 공간은 있다는 것을요.


나만 노력하는 관계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깊은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이 관계는 끊어질 거야'라는 공포입니다. 이 공포는 자존감을 갉아먹습니다. 내가 먼저 손을 놓았을 때 정말로 그 관계가 소멸해버린다면, 그것은 지난 세월 우리가 쏟아부은 진심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어질 듯 팽팽한 줄을 놓지 못하고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꽉 쥐고 버팁니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며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관계의 자연사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모든 관계가 평생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인연은 특정 시기에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지만, 이제는 각자의 궤도가 너무 달라져 멀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일 때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았을 때 멀어질 관계라면, 그것은 이미 예전에 끝났어야 할 관계를 나의 억지스러운 노력이 인공호흡기로 붙들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이제는 나의 에너지를 어디에 써야 할지 다시 점검해봐야 합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답장 없는 메시지에 정성을 쏟고 약속을 거절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시간은 너무나 아깝습니다. 그 에너지를 나 자신을 돌보는 데 쓰거나, 혹은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문득 "잘 지내?"라고 물어봐 주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진정한 관계는 애쓰지 않아도 흘러가는 강물 같아야 합니다. 내가 잠시 멈춰 서 있어도 상대가 다가와 발을 맞춰주는 것, 내가 말을 아껴도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해'라는 계산기가 머릿속에서 돌아가지 않는 관계가 진짜입니다.


만약 지금 누군가와의 관계 때문에 마음이 허전하고, "왜 나만 이렇게 노력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든다면 잠시 그 손을 놓아보세요. 무책임해 보일까 봐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손을 놓았을 때 상대방이 그 빈자리를 느끼고 먼저 다가온다면 그 관계는 다시 시작될 희망이 있는 것이고, 그대로 멀어져 간다면 당신은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의 다정함은 소중한 자원입니다. 아무에게나 헐값에 넘기지 마세요. 당신이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당신을 궁금해하는 사람들, 당신의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고마워하는 사람들로 당신의 곁을 채우기에도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관계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구해야 할 사람은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글이 당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었나요. 혹시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특정 관계가 있다면, 관계를 정리하거나 혹은 마음의 거리를 두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함께 더 이야기해 보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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