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가까워질수록 불편해지는 거리감

진짜 가까움은 편안함이지, 감정의 침범이 아니다

by 김지윤

방금까지 분명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사람과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마음은 즐겁기는커녕 물에 젖은 솜덩이처럼 무겁기만 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몸을 던지면 그제야 참았던 숨이 터져 나온다.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분명 가까운 사이다. 서로의 연애사를 다 알고, 부모님의 건강 상태나 직장 상사의 악행을 공유하며, 남들에게는 차마 하지 못할 치부까지 가감 없이 쏟아내던 사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자꾸만 숨이 막히는 걸까. 왜 그 사람이 내민 손이 따뜻한 온기가 아니라 나를 짓누르는 압박으로 다가오는 걸까.

어릴 땐 ‘거리’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친구와 나 사이에 벽이 있다는 건 우정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서른을 넘기며 깨달았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타인이 절대 밟아서는 안 되는 ‘심리적 민통선’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슬프게도, 그 선을 가장 무심하게 밟고 지나가는 이들은 대개 나와 가장 가깝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디 있어?”

이 다정한 문장은 때로 무서운 흉기가 된다. 이 말 한마디로 상대는 내 사생활의 담장을 훌쩍 넘어온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연봉 문제, 아직 부모님께도 말 못한 이직 고민, 혹은 나조차 정리되지 않은 내밀한 감정들까지. 그들은 ‘가까움’이라는 입장권을 내밀며 내 마음의 안방까지 수색하려 든다. 내가 주춤거리며 거리를 두려 하면, 금세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변한 사람’ 혹은 ‘벽을 치는 사람’으로 몰아세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작아진다. 내가 예민한 걸까. 내가 마음이 좁아진 걸까. 하지만 내 몸이 느끼는 이 거부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가까워진다는 것이 나의 고유한 영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라면, 나는 차라리 영원히 멀리 있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고개를 든다.

진짜 가까운 관계란 무엇일까. 예전에는 모든 걸 공유하는 샴쌍둥이 같은 관계가 최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짜 가까움은 ‘편안함’에서 온다는 것을. 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내가 혼자 있고 싶어 연락을 늦게 해도 “무슨 일 있어?”라는 추궁 대신 “쉬고 싶을 때 쉬어”라고 말해주는 여유. 상대의 불행이나 감정적 쓰레기를 내가 다 받아내지 않아도 그 관계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결국 내가 느꼈던 그 불편함의 정체는 ‘침범’이었다. 친밀함을 구실로 나의 감정 주권을 침해하는 무례함. 30대의 인간관계가 피로한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서로의 삶에 너무 깊숙이 연루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계절이 다르고 각자의 속도가 다른데,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 속도를 강제로 맞추려다 보니 무릎에 무리가 가고 마음엔 멍이 든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아무리 가까워도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일지라도, 내 마음의 방 한 칸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방에 누군가를 들일지 말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어야 한다. 그걸 존중해 주지 않는 관계라면, 아무리 오래된 인연이라 해도 그건 ‘가까운’ 게 아니라 그저 ‘지나치게 붙어 있는’ 것뿐이다.

소파에서 일어나 겨우 불을 켠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아까 헤어진 그 친구다.

[오늘 즐거웠어! 근데 너 아까 표정이 좀 안 좋더라. 무슨 일 있는 거지? 말해봐,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액정 위로 쏟아지는 친절한 침범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예전 같으면 미안함 마음에 억지로 긴 답장을 써 내려갔겠지만, 오늘은 그냥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다. 내 마음의 담장을 다시 세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진짜 가까운 사이라면, 내가 지금 이 침묵을 선택한 이유조차 너그럽게 품어줄 수 있어야 하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불편한 거리감은 결국 우리가 멀어져야 할 이유가 되겠지. 차갑게 들릴지 몰라도, 나를 잃으면서까지 지켜야 할 관계는 이제 내 인생에 없다.

독백처럼 써 내려간 이 마음의 끝에서, 당신도 혹시 누군가에게 ‘침묵할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지진 않았나요? 마음의 빗장을 잠시 걸어 잠그고 싶은 그 사람에게, 오늘 하루만큼은 답장 대신 당신만의 고요를 선물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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