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는 가벼운 하와이안 셔츠 아래는 입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부드러운 실크로 된 반바지 왼손에는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병맥주 바지 호주머니에는 땅콩 한주먹 그렇게 바닷가 해변을 걸으며 맥주를 홀짝이다. 주머니 속 땅콩을 한 개씩 빼먹으며 바람을 즐깁니다.
오후에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릴 것 같은 햇빛과 더위는 온 데 간데없고 아이스크림 냉동고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노을 진 하늘 시원한 바람 쌉싸름한 맥주 그리고 뜨문뜨문 떠오르는 기분 좋은 추억들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을 보낸다고 생각하다가도 늘 불청객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머릿속은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현듯 찾아오는 나쁜 기억 안 좋았던 기억 슬펐던 기억, 기억이 기억으로만 끝나면 좋겠지만 뇌와 심장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듯 분노 앞에서는 심장이 부가티에 엔진을 단것처럼 뛰어버리고 슬픔 뒤에는 프레스에 심장을 찍어 누르듯 죄여 옮니다.
범주 할 수 없는 자연을 마주하다 보면 나와 나를 융화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사막에 모래 알갱이처럼 가벼이 흩어졌다 뭉쳐졌다를 반복합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 앞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기 위해 음악을 듣습니다. 기분이 날뛸 때는 차분한 음악을 기분이 너무 가라앉을 때는 신나는 음악을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이것도 저것도 듣습니다.
걷다 걷다 우연히 돌과 돌사이에 병을 발견합니다.
“쯧쯧쯧 선진국 치~ 무슨 쓰레기를 이리 버리는데 시민의식이 쓰레긴데 선진국 멀었어 멀었어 쯧쯧쯧”
언젠가부터인가 왼손에 들고 있던 맥주병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무튼 돌 사이에 낀 병이 있는 곳으로 가 벼를 꺼내봅니다. 병을 유심히 보는데 처음 보는 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에서 떠내려온 병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다고 외국 어느 나라에 병도 아닙니다. 흐릿하게 한국말이 적혀있고 상표가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건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어떤 음료가 담긴 병인 듯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보다 이렇게 멀쩡할 수 있나 싶었다. 플라스틱도 아니고 병인데 말이다. 돌 근처면 깨져도 진작에 깨져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그러다 이병이 언제 버려졌는지도 모르는데 왜 오래전에 버려진 것이라 지레 짐작한 거지라는 걸 할까 싶습니다. 단지 오래된 음료병이라서 오래전에 누가 먹어서 버렸겠지 이런 논리였나? 병을 보며 생각하다. 왜 내가 이런 쓸데없는 문제에 문제를 만드는 걸까?
외로워서 그런 것인가 병이 말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정체가 뭐니? 오래전에 버려진 거니? 아님 얼마 전에 버려진 거니? 하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병이 말하기라도 하면 나는 안 놀래 자신이 있을까 라는 의문과 왜 난또 버려졌다고만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말을 할 줄 아는 병이라면 걷거나 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병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자신이 몸이 산산조각 나서 깨부숴 질 수도 있지만 탈출한 것은 아닐까요. 바다로 탈출해 망망대해를 부유하다. 이곳에 바위사이에 끼여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병을 쓰레기통에 버릴 것이 아니라 다시금 바다로 돌려보내줘야 하는 걸까요 아님 바다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나쁜 일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걸까요.
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넌 어쩌고 싶어” 병이 말하지 않을 걸 알면서 진짜 말할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금 물었습니다. “넌 어쩌고 싶어 쓰레기통에 들어가면 다시 태어나거나 아님 다른 친구를 만날 수도 있어 하지만 바다로 가면 자유로워질 수는 있지만 외로울 거야”
병이 대답해 주기를 바라면 몇 분을 물끄러미 봐라 봤습니다. 석양빛이 병에 반사된 눈이 부십니다. 병은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병이 말을 못 해 못하는 것인지 말은 하지만 내가 못 알아먹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쪽으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석양이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뒤에는 산이 보이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맥주는 없지만 주머니에 두 알에 땅콩이 있어 입에 털어놓고는 와그작 씹어 먹으면 결정을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