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맛
주위에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여행지로 가면,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한가로움, 여유, 위로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해요. 여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최대한 여행을 가려고 한다는 분도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이 돼서까지 집-학교(직장)-교회만 돌았습니다. 어딜 다녀 본 적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그게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집이 제일 좋아요. 집에 있으면 안전하고 익숙하고 비용이 적게 듭니다. 밖에 나가면 잠자리도 편치 않고, 별 음식도 없습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요? 돈 쓰고 체력 써가면서 돌아다니는 게 여행 아닌가요.
여름휴가라도 가려고 하면 냉장고 정리, 쓰레기 정리, 욕실 청소, 여행에서 돌아오면 먹을 음식 체크까지.. 할 게 많아요. 여행지에서 필요한 물건을 빠짐없이 챙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다녀오면 며칠 치 빨래가 세탁실에 고스란히 쌓이죠. 가져갔던 물건들을 모두 제자리에 돌려놔야 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세 아이를 데리고서는 아무리 좋은 곳에 가도 집보다 힘들었어요. 정신이 없고 재미도 없는 ‘사서 고생’이었습니다.
비용도 아깝지만 체력이 달려서도 여행 다닐 엄두가 안 났어요. 놀러 다니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 가야 할 때는 전혀 기대 없이 집을 나섰어요. 휴가 때도 집에 있기를 바랄 정도였으니, 나도 참 어지간합니다.
운동이나 취미로 강습을 받는 분들이 있어요. 공연이나 전시를 즐기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합니다. 에너지가 생기고 영감을 얻기도 해요. 비용과 시간이 들지만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투자합니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하기도 하지요.
국내여행은 물론, 긴 일정으로 외국에 다녀오시는 경우도 꽤 많아요. 친구와 가족들, 때로 혼자서 떠납니다. 생각보다 여행을 많이들 다니시는 게 나는 좀 신기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아주 여유롭지 않고서야, 1년에 한 번 가기도 쉽지 않잖아요. 해외여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꾸만 고개가 갸우뚱해졌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대체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되면 저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우리 가족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어떨지 모르니), 아니 우리 부부는 혹 제주도나 동남아 정도를 가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노회에서 목회자 부부동반 여행을 가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미국, 유럽 같은 곳은 글쎄요. 생전에 못 가볼 것 같습니다.
울적해졌습니다. 여유 있는 가정들이 부럽더군요. 우리 집 아이들에게 미안했습니다. 내가 여행의 즐거움을 모르는 건 시대탓이라 하면 그만이지만, 아이들은 아니잖아요. ‘아빠가 목사라서 세상 넓은 줄 모르고 어른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속상했습니다.
가라앉은 기분이 한동안 회복되질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말도 못 하고,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혹시나 상황이 된다고 해도 새벽예배가 걸립니다. 사정상 여행 다닐 수 없는 분들도 떠오르고요. ‘목사 가정은 어쩔 수가 없구나.’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못 가는 건 속상한, 이상한 상태가 됐습니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딱한 처지’가 되어, 은근히 하나님께 신세한탄을 했습니다. “서글픕니다! 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속이 확 좁아져서 슬그머니 입이 나왔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모 안 됐을 것도 아니면서, 자꾸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고 지내던 어느 날이에요. 설거지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근데 나, 여기서 영원히 살 게 아니잖아!’ 진짜 내 집은 천국에 있거든요. 이게 여행 온 거랑 뭐가 다른가요. 남편이랑 아이들이랑 잠시 여기서 지내는 거예요. 이땅에서 하염없이 사는 게 아니라, 얼마 안 돼서 주님이 마련해두신 곳으로 갈 겁니다. 머무는 동안, 다른 여행자들과 여러가지 일들을 겪는 거고요.
어머나 세상에. 갑자기 즐거워졌습니다. 재밌어졌어요. 천국에 가면 그까짓 미국, 유럽 못 가본 게 애석하겠어요? 하하하. 거기 안 가도 됩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 동네 못 벗어난 데도 괜찮습니다. 머지 않아 빛나는 내 집으로 갈 거니까요. 여행을 즐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반찬 뭐 해 먹나 궁리하고, 애들이랑 웃긴 얘기하는 시간이 소중해졌습니다. 만끽해야죠. 사랑하는 가족, 이웃, 주 안에서의 형제, 자매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곧 끝날 거예요. 이렇게 특별한 시간이라니 멋집니다. 매 순간을 아낄 겁니다. 인생은 짧아요.
하루하루가 이어져 ‘영원’에 닿습니다. 지금 여기, 내 집이 천국이기도 해요.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 나라니까요. 여기서 누리는 천국이 영원까지 계속되겠지요. 예수 믿지 않았다면 상상하지 못했을 초월입니다.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영원한 하늘나라를 살고 있다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들만 누릴 수 있는 기막힌 여행입니다.
가끔 힘든 날이면, 속으로 되뇌어 봅니다.
‘내 집, 천국’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집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해요.
이제는 여행의 맛을 좀 알겠습니다. 가끔 멀리 심방이나 문상을 가야 할 때, 이동 시간을 즐깁니다. 가끔이라도 가족들과 나들이를 다니려고 노력해요. 자연의 아름다움에 조금씩 눈뜨고 있습니다. 사람은 산, 나무, 바람, 물을 대할 때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가능한 자주 자연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구름멍’을 좋아합니다. 맑게 개어 구름이 펼쳐진 하늘을 발견하면 심장이 두근댑니다. 반가워서 웃음이 나요. 바라보고 있으면 머리가 씻기는 기분입니다. 비가 지나간 다음이면 구름 색깔이 다양해서 좋고, 바람이 불면 구름 모양이 계속 바꿔서 더 좋습니다. 화창한 날이라면 어디서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어요. 이 여행, 참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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