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우리들의 이야기. 외고 일기

내신의 덫 . 그리고 5월 축제의 시작

by 밤호수

이 개성도 강하고, 재주도 다양하고, 무엇보다 똑똑한 아이들 틈에서 어찌됐든 살아보겠다고 아둥대는 날들이 이어졌다. 진단고사 이후, 중간고사이던가. 성적을 가지고 담임선생님과 차례대로 상담을 하던 어느 때였다. 내 차례라 교무실 선생님 자리옆에 앉았던 나에게 그녀는 다짜고짜 막대기를 들이댔다.


- 넌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뜬금없이 앉은 자리에서 막대기로 허벅지를 때렸다.

딱.딱. 딱. 세 대.

바로 그것이다.

첫 시험의 저주.

지나치게 잘 보았던 (잘 볼 수밖에 없었던 ) 첫 시험 결과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잘 할 수 있는 애가' 들어오자마자 성적이 떨어졌으므로 ‘마땅히 혼이 나야 한다'고 한 것이다. 선생님 입장에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나에겐 충격이었다. 이미, 이 학교 아이들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은 인식할 때 즈음이었지만, 그래도 공부 못한다고 맞아보는 건 진짜 오랜만이었다. 초등학교 때 공부 안하거나 숙제 안하면 맞아보기도 했지만. 그거랑 차원이 다른 느낌. 중학교 때는 나름 늘 우등생이었던 나의 ‘자존감'이 뚝 떨어지고, 또 세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었달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파서 우는 눈물은 아니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냥 창피했다.

- 너 왜 우니. 뭐 잘했다고 우니. 오늘 교감선생님한테 인사시켜줄려고 했는데 안되겠다.


나는 그 당시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살았다. 엄마는 지방에서 선생님을 하고 계셨고, 우리 자매들만 서울로 유학을 와 있었다. 언니들은 이미 대학생이어서, 날 돌보아 주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못내 안타까우셨던 엄마가 담임선생님께 편지를 보내신 것이었다. 뭐 잘 부탁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겠지.

그 편지를 담임선생님은 교감선생님께 보여드렸고, 엄마의 애절하고 아름다운 편지에 교감선생님은 그 딸인 날 보고 싶어하셨다고 했다. 그런 건 나에겐 상관도 없었고, 다만 맞은 허벅지가 화끈거렸다. 옆에 선생님들도 다 보고 계신데 창피하기도 했다.




아마 처음이었어서 그랬을 것이다.

몇달 후부터는 나도 그런 상황에 익숙해졌달까. 반 등수의 앞자리가 1,2,3,4, 다 가보는 것에는 웬만해선 끄떡도 하지 않을 맷집이 점차 생겨갔다. 강심장이 된 걸까 포기를 해버린 걸까. 하지만 사실상 ‘포기했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포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누구도. 경쟁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끝까지. 달렸고 경쟁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좀 달랐을까. 어문계열을 이미 결정하고 시험 때마다 마음편히 노는 남자애들은 나같은 소심한 여학생에겐 일종의 ‘동경'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도 어문계에 갈 건데. 나도 여기서 내신이 필요가 없을 텐데. (당시 외고는 전공어로 대학입시를 보면 내신혜택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신을 완전히 놓지도 못하고, 가져가지도 못하는 그 어정쩡함이라니. 결국 고3 끝까지나는 그렇게 어정쩡하다가 끝났다. 그 결과는 어정쩡함 그 자체인 내신으로 나타났고, 졸업할 때 나의 내신등급은 ‘7등급'이었다. 1등급에서 15등급 사이 7등급. 도대체 결국 써먹지도 않았을 7등급을 받겠다고 나는 그렇게 시험 때마다 공부를 ‘하지도 않고 안하지도 못하는' 괴로운 상태를 매번 반복했던 걸까.


고3 때 담임선생님은 중간 기말 기간이 되면 반 아이들에게 말했다.


- 어문계열갈 학생들은. 말 안해도 알지? 서로 도와주자.응?


그럼 남자애들 일부는 환호성을 지르며 선생님의 말씀에 화답했다. 일종의 ‘비공식 딜'이랄까. 그리고 '비공식 휴가'랄까. 그 아이들은 차라리 그 기간에 마음이라도 편했지. 그 기간에 잠이라도 잤지. 나는 마음도 불편하고 잠도 제대로 못자고 결과도 좋지 못한 시간을 3년 내내 보냈으니 정말 밑지는 장사를 한 건 확실하다. 그렇다 쳐도, 인생앞을 어떻게 안다고, 어문계를 안가게 될지 어떻게 안다고, 그렇게 속편하게 내신을 바닥을 쫙~ 깔아줄 수 있는 남학생들의 여유는 어디서 온 걸까? 진심으로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축제가 다가왔다.

입학 후 처음 맞이하는 축제. 이 살벌한 학교에도 봄기운과 꽃향기가 동시에 맴돌며, 축제의 향연은 감추려 해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따뜻해진 날씨만큼 공기는 노곤해졌고, 창밖의 공기 중에 봄향기가 날아다녔다. 수업에 집중도도 현저히 떨어졌다.

어쩔 수 없다.

5월이었다.

축제의 시작이었다.

우리학교의 축제는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Language fair.

말하자면 합창대회이다. 각자 반마다 전공 언어의 노래와 영어 노래. 두 곡씩을 부르는 반 대항 합창대회이다.


또 하나는, 발표회. 각 동아리들마다 그동안 연습한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고 실력을 뽐낸다.


둘 다 설레는 건 마찬가지이다. 교실에서는 Language Fair 준비로 들뜸과 분주함의 연속이고, 점심시간 저녁시간마다 동아리의 축제 연습도 피치를 올린다. 동아리가 없는 사람이 괜히 머쓱해지고 심심할 지경인 기간이 이 때이다.


평소에는 야간자습 시간을 지독히도 감시하는 선생님들이 은근하게 (대놓고는 아니고) 감시의 끈을 느슨히 잡는다. 이 때만큼은 입시학원같은 외고임에 무색하게 동아리학교가 된다. 나는 Concertino라는 실내악 동아리에서 바이올린 파트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늘 레슨과 솔로만 하다가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와서 실내악을 맞추고, 많은 영화음악을 연주해 보는 경험은 짜릿했다. 발표회 준비를 하며 저녁 늦게까지 동아리실인 시청각실에서 연주를 하는 날이 늘어났다. 담임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빛을 피해가면서. Eric Creipton, 영화 대부. 가요 ‘사랑으로' 등 서정적이고 대중적인 곡들을 연주하는 재미가 있었다.


Language Fair는 또 나름대로 5월 내내 교실을 흥분된 분위기로 만들었다. 우리반이 부른 스페인어 노래는 귀엽고 깜찍한 분위기의 ‘Cielito Lindo’ 1학년 다운 귀여움을 살리자는 게 담임선생님의 전략이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제목이 지금도 기억나는게 신기!


영어노래는 ‘That’s what Friends are for’ !

이 아련한 제목의 노래는 신의 한수였다.

합창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이 노래는 우리의 아름다운 5월.

축제의 노래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영원히, 지금껏 잊혀지지 않을 5월의 노래.


And I never thought I'd feel this way

And as far as I'm concerned

I'm glad I got the chance to say

That I do believe I love you

And if I should ever go away

Well, then close your eyes and try

To feel the way we do today

And then if you can remember

Keep smiling, keep shining,

Knowing you can always count on me For sure

That's what friends are for

For good times and bad times

I'll be on your side forever more

That's what friends are for


언제나 웃고 밝게 빛나길.

넌 언제나 나에게 기댈 수 있다는 걸 알지.

친구란 그런 거니까.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언제나 네 옆에 있어줄게.

친구란 그런 거니까.


나는 너에게 고마워.

우리가 같이 있지 않을 때에도.

눈을 감아보면 알 수 있을거야.

내가 이 말을 마음에서 하고 싶다는 걸.

네가 기억할 수 있다면 말이지.



지금도 어쩌다 들려오면 가슴이 시려오는 노래.

멀리 있는 그네들에게 다 전하고픈 이 노래 가사.

함께 있던 내 옆의 그 친구들이 생각나는 이 노래는 5월의 햇살과 바람을 타고 그렇게 우리에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