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들의 이야기. 외고 일기

4. 외국물 먹은 아이들

by 밤호수

아침에 눈뜨자마자 카톡이 울린다.

다섯 아이, 대학에 간 큰 아이 빼고 아래로 네 아이를 돌보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 한 명과, 역시 두 아이를 키우며 사는 다른 친구 한 명이 있는 카톡방이다. 다섯 아이의 엄마는 나와 멀지 않은, 미국으로 친다면 거의 옆집 거리의 버지니아에 살고 있고, 다른 친구 하나는 내가 사는 매릴랜드에서 아래로 아홉시간쯤 차를 타고 달리면 있는 아틀란타에 살고 있다.

'이거 사 봤어?'

'난 마트 왔어. 아침 뭐 먹어?'

뭐 이런 일상적인 대화에 수다이다.

이런 수다가 나는 고맙다.

합쳐서 아이가 아홉인 애엄마들에 각자 자기 일도 바쁜 40대 중년이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들끼리는 아직도 철딱서니 하나 없는 여고생 그 자체인, 이 수다가 나는 감사하다.

그리고 다섯 아이의 엄마인 그 아이,

그 애가 단발머리에 안경을 끼고,

그 어느 날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왔던 그 날을 떠올린다.




93년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르고

꽃은 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를 관찰했고,

반에 빼곡한 서로서로의 눈빛과 손짓과 말과 행동에 반응했다.

서로가 서로를 궁금해했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함께 해야 했던 절대시간 속에

그렇게 서로가 조금씩 익숙해져갔다.

아니 어쩌면 끝까지 익숙해지지 못했던 걸지도.


여자아이들이 열 여덟 명.

세 명씩 여섯 줄로 한 분단.

남자아이들도 세 명씩 앉아서 두 분단.

우리는 늘 그렇게 움직였다. 번호순으로 나와 붙어있던 두 아이들이 오랫도록 내 짝이 되었다.

짧은 커트머리에 큰 눈을 가진 아이. 스포츠를 참 잘 하고, 시원시원한 말투를 지녔던 소녀.

단발머리에 지독한 곱슬이었던 또 한 명의 소녀. 안경 속에 반짝거리는 눈을 가졌던 아이. 마음은 그보다 더 어렸던 소녀. 이 두 소녀가 나의 짝이었다. 그리고 또 열다섯의 다른 소녀들.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한 명의 남자아이가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생겼다. 그렇게 금세도, 그렇게 빨리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검정고시를 치렀다 들었다. 그렇게 만났다 금세 헤어지는 슬픈 일도 생겼다.



반에는 여러 명의 소위 ‘외국물을 먹은'아이들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이유와 여건으로 외국에서 살다가 온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잘 몰랐다가도 회화시간에 한번 발음을 들어보면 한 줄을 채 읽기도 전에 이미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영어 시간에, 스페인어 전공 시간에, 그 아이들은 신기했고 (심지어 나에겐 ‘신비했고'), 또 절대적인 존재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없으면 수업 진행이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나 같은 평범한 아이의 현실을 일깨워주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나 역시 외고에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영어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국어과목은 나의 최애 과목이었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내가 어학에 꽤나 소질이 있는 줄 착각했다. 영어도 잘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외국물 먹은 아이들의 존재와, 외국물은 안 먹었는데도 마치 먹은 것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아이들 틈에서 일찌감치 착각은 깨어졌다.

아, 지금도 미국 산지 십년이 지났는데도 절대로, 어디 가서 ‘외고 출신'임을 밝힐 수 없는 수준이다. (사람들이 ‘외고 출신'은 다 영어도, 외국어도 잘 하는 줄 착각함)


그 중에서도 발음이 완전 차원이 달랐던 한 아이가 있었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도 입을 쩍 벌리고, 그 후론 발음을 가르칠 때마다 그 아이를 찾곤 했는데. 어느 날이었던가. ‘FIlm이란 단어를 해보라고 시키셨다.

F.i.l.m. 필름

필름이 필름이지 뭐가 굳이 다르다고? 생각을 했던 나는, 뇌가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필름이 필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도 ‘FIlm’이 한 음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이, 한 음절 안에 ‘ㅣ’과 ‘m’이 다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 엄청난 발음이란! 지금까지도 그 충격적인 날이 기억난다.

꼭 살다온 아이들 뿐이 아니었다. 나중에 점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아이들의 영어공부 베이스에는 이미 어린 나이부터 ‘팝송'이나 ‘굿모닝팝스’ ‘외화' 등의 매체를 통한 자기주도적 영어 학습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오래는 아니더라도 1~2년씩 외국에 살다와서 영어를 잘 하는 아이들은 그 아이 외에도 여러 명이었다. 우리 반은 그래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다른 반을 보면 이미 외모부터, 눈빛부터 외국물 좀 먹은 티가 팍팍! 나는 아이들이 꽤나 많았다. 나는 이유없이 또는 이유있이 그들이 부러웠고, 알 수 없는 동경의 이국에서의 삶을 경험한 그들에 나와는 다른 자유와 개방의 분위기를 느꼈다.


스페인에 살다온 남자아이 하나는, 스페인어 회화 시간마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었다. 키가 컸던 그 아이는, 자신은 절대로 외국에 살다 온 특례 입학이 아니라,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외고에 입학했다고 지금까지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그렇게 스페인어를 잘 하니까, 우리는 당연스레 그 아이가 특례입학생일 거라고 착각했을 수밖에! 우리는 선생님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쳐다보곤 했으니까.


1학년 여름 즈음에, 그 아이가 학교를 떠나 부모님을 따라 다시 외국에 나갔을 때, 남겨진 스페인어 회화 선생님 Franco와 우리들의 넋나감이란! 지금까지 선생님과 우리들 사이에 그토록 큰 갭이 있는 줄은 정말이지 몰랐던 것이다. 그 아이가 떠난 후 몇 달 동안 우리는 회화시간마다 선생님의 말보다 더 큰 한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당황스럽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쳐다볼 아이가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아르헨티나라는 나라에서 날아왔다.

스페인어 이름은 샤밀라. 얼마나 남미 향기가 풍기는 이름인가!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똑 부러지는 말투로 엄청나게 유창한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샤밀라가 왔을 때, 프랑코도 우리도 얼마나 속이 시원했던지! 이 아이와 친해지고 말고, 어떤 아이인지 우리와 잘 어울릴지 그런 건 일단 다 뒤의 문제였다. 샤밀라는 우리의 구원 투수였다. 다른 아이들은 어땠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3년의 스페인어 회화 시간동안 선생님이 아닌,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샤밀라만 쳐다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르헨티나에 열살에 건너가 무려 7~8년을 살다온 그녀는 스페인어 뿐 아니라 한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들 듯한 우리의 하루 14시간 이상의 학교 생활을 잘도 버텨냈다.


2학년이 되면서 우리의 회화 선생님은 프랑코에서 ‘모레노'선생님으로 바뀌었지만, 샤밀라와의 1대1 대화는 여전했다. 아, 그 때는 실력이 일취월장하던 스페인어 능력자들이 생겨서 조금은 상황이 나아졌던 듯 하지만. 아이들은 조용했던 ‘모레노'선생님을 ‘내일모레노'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의 그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고, 오직 샤밀라 뿐. 그렇게 샤밀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틈도 없어, 통역사로서의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 샤밀라의 동의 하에 실명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