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기숙사 첫 집

미국정착 스토리 1.

by 밤호수


불확실하지만 푸르른 꿈을 안고

미국에 온 지 햇수로 13년째가 되어 간다.


남편은 정신과 의사로

나는 교사로

모두 나름 한국에서 탄탄할 듯(?) 보였던 직장을 접고

이 낯선 땅에, 심지어 영미권에 단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우리가 섣부른 모험심과 용기만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이

2009년.


미국의사고시를 통과했지만

달달 외운 인터뷰 내용 외에

영어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편이었다.

발음은 또 어떠했는지!

(지금도 비슷하긴 하다)


아무도 그를 뽑아주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운명같이 만난 유태인 닥터 Sperber는

만난 자리에서 그에게 매칭을 권했고,

그렇게 우리는 뉴욕 롱아일랜드 입성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건 운명이었다.

후에 몇 번이나, 영어 때문에

병원에서 쫓겨날 뻔 했던 남편을

그가 늘 구해주고 믿어주었으니까.


두살 반 된 아들아이를 데리고 무작정 온 미국.

다행히도 롱아일랜드 병원에서 우리는 제공된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집값을 자랑하는 롱아일랜드에서 그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저 기뻐하기에 기숙사의 상황은 처참했다.


다시 묘사하고 싶지도 않은 첫 집의 기억.

작은 방 하나에 거실겸 부엌 하나.

작은 건 둘째치고 우선 화장실이 다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욕실 옆 타일 속으로 상수도관이 지나가는 게 다 보였고, 온 욕실의 타일이 다 반쯤 부서져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윗집에서 에어컨을 틀 때마다 물이 흘러 떨어졌다. 이십년쯤 청소를 한번도 안한 것 같은 창문은 먼지덧깽이가 두꺼워 그냥 눈을 감는 게 나았고, 그 창문에 우리는 어찌할 지 몰라 커텐 대신 하얀 쓰레기봉투를 다 붙여놓고 사생활을 보호했다. 베일 듯 뾰족한 카펫트의 촉감은 덤이었다.


두살배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운 나는 날마다 병원 건물담당 부서로 출근을 시작했다.

영어로 미리 적어놓은 멘트를 날마다 똑같이 반복했다.

집을 바꿔달라. 위험하다. 우리가 다치면 고소를 할 수도 있다. 언제 바꿔줄 것이냐. 확실하냐.

게으르고 무능한 병원 건물담당부서의 디렉터는 개인생활에 관심이 없었다.

사람들은 양주를 사들고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날마다 같은 시간에 유모차와 함께 병원에 출근을 했을 뿐.


그러나 그 작고 위험한 집 앞에서도

아이는 개미를 불러모으며 놀고

다람쥐를 쫓아다니며 행복해했다.


두달여가 지난 어느 날.

내 얼굴을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킬 듯한 그가 결국 투베드룸의 열쇠를 건넨 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눈물이 날 듯이 기뻤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장 기뻤던 날이다.

뭔가 해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봤자 똑같은 기숙사이지만, 적어도 타일은 제대로 갖춰진 투베드룸으로 이사를 가던 날.

한국의 편안한 아파트는 기억도 나지 않았고, 그저 감사했다.

백년은 된 듯한 삐그덕대는 나무싱크대도,

너무 더러워서 비둘기들의 집이 된 창틀도,

고장난 팬과 에어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은 30시간 근무에, 응급실 당직으로 몸이 가루가 될 지경이었고,

영어를 못 해서 날마다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흑인 노숙자들, 알콜중독자들이 많은

일종의 시립 병원이었다.

응급실에서 오가는 빠른 대화를 알아듣고 인터뷰하기에 남편의 영어는 너무도 짧았다.

'도대체 쟤를 누가 뽑았냐'고 아우성들이었다.

그때 남편을 뽑은 유대인 닥터는

'나는 그를 지금 당장 써먹으려고 뽑지 않았다.

그의 미래를 보고 뽑았다.

그에게 시간을 줘라.

2년만 있으면 영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라며 보호해주었다. 우리의 은인이다.

(실제로 2년이 지난 후 영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남편에게 나는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해나갔다.


그 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빨래를 하러 다니던 것이었다.

세탁기가 없으므로, 며칠에 한 번씩 쓰레기봉투 두개 가득 빨래방에 가서 두어시간 기다린다. 아이와 함께 노래도 부르고, 근처 마트도 구경을 다니며.

그렇게 빨래를 마치고 돌아올 때면 아이는 어느새 차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그 아이를.

좁고 어두운 계단을 통과해

이층으로 옮기면서

나는

고생스럽지만 행복하다고 느꼈다.

한국에 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을

아이와 공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뭐랄까.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

진하고 단단하고 두터운 삶의 모습과 감정들.

그것은 또다른 모습의 행복이었다.

쓰레기봉투를 창문에 붙여놓았던 낡은 기숙사 첫 집

- to be continued -